게으른 출근길, 손목에 찬 애플워치가 진동합니다. 친한 지인의 부고 알림장입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푸른 바다 같았습니다. 저 바다를 오늘 누군가 건너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옷매무시를 체크합니다. 다행히 조문을 가도 괜찮은 컬러의 옷과 단정한 스타일입니다. 올해는 꼭 봄가을에 입어도 좋은 검은색 정장을 한벌 사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겨울에도 코트를 덧입으면 조문용으로 완벽해지는 단정하고 밋밋한 검은색 정장을요. 나이가 드니 그만큼 조문 갈 일이 많아집니다. 아직 친구나 선후배의 장례식에는 간 적은 없지만 언젠가 이렇게 그들 중 누군가의 부고 알림장이 예고 없이 오는 날이 오겠지요. 저는 언제나 조문은 첫날 저녁시간이 아닌 조문객이 가장 뜸할 것 같은 시간인 오후 5시경에 갑니다. 유가족들의 마음이 진정되고 차분해지는 시간. 그들과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지인이 따라주는 맥주 한잔을 마시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옵니다.
제가 떠난 회사를 아직도 굿굿하게 매우 잘 다니는 후배는 어느덧 본부장이 되었습니다. 입구에 줄줄이 화환들이 들어서 있고 회사에서 보내준 상조회사 직원들이 부지런히 식사대접을 도와줍니다. 널찍한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앉아있습니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춥니다. 문득 2년 전 아버지의 장례식장 생각이 났습니다. 프리랜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큰 딸과 외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망한 큰 아들과, 대기업에서 부장까지는 했지만 퇴사 후 뭘 하고 사는지 모르는 작은 딸과 대구에서 자신의 사업체를 하는 막내아들 - 그들이 불러 모운 문상객들의 숫자는 초라합니다. 그래도 넉살 좋고 성격 좋은 막내의 성적이 제일 좋은 편이네요. 작은 딸인 저는 장례식장이 부산이 아니라 제가 대학을 나오고 사회생활을 한 서울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며, 초라한 성적에 기가 죽는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삼 형제 중 유일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는 둘째에게 첫째 형이 귀가 마르고 달토록 하던 그 말의 참뜻을요. “ 너 엄마 돌아가시지 전에 절대 회사 그만두면 안 돼. 엄마 장례식 초라한 거 절대 못 봐 ” 엄마의 손님으로 작지도 크지도 않은 장례식장이 점점 찰 때 저는 올케와 아버지의 빈소를 지키며 몰래 꺼내온 맥주 한 병을 각자의 잔에 나눠마시며 말합니다. “ 회사 좀 더 오래 다닐 걸 그랬다. 이런 기분일 줄 알았다면… 아쉬운 거 없이 이만큼 잘 키워준 아버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네.” 나를 보며 세 자녀 이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짓습니다.
오늘 상주인 제 후배는 막내입니다. 누나도 형님도 회사를 아직 다니는 중이라 손님들이 많고, 후배는 작년에 본부장으로 승진하고 한 참 물이 오른지라 팀원들도 광고주도 업체들도 잊지 않고 부의금을 보내고 찾아옵니다. 후배의 베프이자 한 때 직장동료이기도 했던 녀석이 나에게 반갑게 알은체를 합니다. 그리고 최근 퇴사 후 모대학 교수가 된 후배가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로 나를 이끌고 차가운 맥주 한 컵을 따라줍니다. 식사를 담당하시는 분이 이것저것 차려내기에 나는 맥주만 한잔 하겠다고 물리자 그가 말합니다. “ 누나, 쟤 돈도 많아. 다 남겨도 되니까 푸짐하게 차려놓고 드셔 ” 아버지의 장례비를 치르면서 테이블에 놓인 저 접시 하나하나가 다 돈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에 가면 자동적으로 먹지 않을 음식은 물리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었네요.
나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내 앞에 앉는 상주에게 묻습니다. “ 아프지 않고 편히 가신 거면 좋겠다. 힘을 내고 앞으로 더 잘 살자.” 어느새 복도 입구를 촘촘히 채운 화환들과 제법 큰 장례식장을 꽉 채운 문상객들을 보며, 우직하게 회사를 잘 다닌 덕을 보는 그를 부러워하기보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마음이 더 커집니다. 직접 겪어 본 그 마음은... 늘 부르던 그 이름이 남은 생에 영영 사라졌다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소환될 그런 마음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요. 평생 내 편이 되어준 부모님이 그 쓸모를 다하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진 것을 실감할 때마다, 순간 물먹은 솜뭉치를 삼킨 것처럼 가슴을 꽉 채울 그런 마음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요.
장례식 장을 나서며 옛날보다 동그래진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다 살며시 안았습니다. 살짝 흔들리는 어깨가 그가 겪을 상실의 첫 날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퇴근길에 빨라지는 걸음들 사이로 느릿느릿 조금 걷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문상을 갈 때마다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내가 알아보는 일은 이제 그만하기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합니다. 타인은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데 그 관심 없음이 나의 초라함에서 비롯된다는 자학에 가까운 생각들을 하나둘씩 지워내 보기로 합니다. 초라하고 흔들리는 이런 마음 덕분에 망설이던 일들은... 막상 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되고, 오히려 마음이 조금씩 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문득 제가 좋아하는 노은님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 뭘 그렇게 찾으려고 애를 쓰나? 잃어버린 것도 없으면서…” 백 번 맞은 말을 이렇게 쉽고 간결하고 위트 있게 하는 그녀의 생전 환한 얼굴을 그리며 이렇게 답을 해봅니다. “ 네, 맞아요. 그런데 제가 잃어버린 게 있더라고요. 제 자신요. 전 매일 그걸 찾으러 다녀요. ” 오늘도 나를 찾기 위해 애를 쓰며 남은 반잔을 채워봅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