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제 봄이 오는 것 같네요. 햇살이 따뜻합니다. 지갑에 있던 유일한 현금인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입장권을 사고 종묘로 들어섭니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은 메마른 잔디와 헐벗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종묘 내부 구조를 그려놓은 현판 앞에 자원 봉사자로 보이는 인상 좋은 남자분이 서 계시네요. 그 앞에 삼삼오오 저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분들이 모여있고, 일본인으로 보이는 관광객들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도 보입니다. 자원 봉사자 분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 선 모두에게 골고루 눈을 마주치며 큰소리 말합니다. “ 종묘는 알고 보면 더욱 멋진 곳입니다. 경복궁 창덕궁을 보기 전에 무조건 종묘부터 봐야 합니다. 제가 속속들이 알려 드릴 터이니 한 시간만 투자하세요. 저를 따라 종묘 투어를 해보세요.” 잠시 망설이다가 저는 그 투어에 합류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분은 투어 도중 종종 퀴즈를 내셨는데 저는 한 문제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답니다. 그저 멋지게 지은 궁인 줄 알았는데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곳이었네요. 대학 나오면 뭐 합니까. 우리 역사에 대해 외국 관광객보다 아는 것이 없네요. 종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 5월과 11월에 지내는 제례는 꼭 한번 봐야 하는 장관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시네요. 단 인터넷으로만 예약이 가능하며 금세 매진이 된다고 하네요. 조상을 정성껏 모셔야 후손들이 잘 되고 나라가 평온하다는 믿음과 소명으로, 이곳에서 왕들은 날이 바뀌는 그 시각부터 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 절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는군요. 왕 노릇도 쉽지는 않네요. 갑자기 대충 형식만 갖추었던 아버지의 제사가 생각나서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습니다.
한 시간의 투어를 끝내고 문득 눈이 오는 날에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 겨울 첫눈이 오는 날 나와 이곳에서 약속을 해봅니다. 그래 첫눈이 오면 꼭 만나자 하고 말이죠.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종묘를 순찰하는 ‘순라청’에서 이름을 따왔다던 핫 플레이스인 서순라길을 입력합니다. 걸어서 5분 거리네요. 네이버 지도는 코 앞에 있는 걸 물어보냐며 경로 소개도 안 해줍니다. 눈치껏 다정한 연인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그곳에 도착하고, 햇살 좋은 카페나 바를 물색합니다. 죽치고 앉아 제가 너무 애정하는 백수린 작가님의 신작 소설을 읽기 위해서 말이죠.
한껏 멋을 낸 젊음들이 오고 가고 이미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어쩌다 눈에 들어온 빈자리는 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금세 채워집니다. 종묘의 담벼락을 따라 두어 번을 같은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운 좋게 야외 테이블 두 개가 비어있는 야담 한 카페를 발견합니다. 얼른 가방을 의자에 올려놓고 지갑을 꺼내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메뉴판을 뒤적이다 화이트 와인 한잔을 주문합니다. 역시 이런 날에는 와인이지 하면서 말이죠. 햇살이 제법 따뜻했지만 간간히 찬바람이 불어 코트의 깃을 세우고 후드 티의 모자를 덥어 쓰자, 눈치 빠른 젊은 종업원이 길쭉한 화병처럼 서 있던 난로를 켜주네요. 좀 야박한 양의 와인 한잔이 테이블 위에 놓이고 설레는 마음으로 소설책을 펼칩니다.
봄햇살 같은 문장들을 안주 삼아 와인 한 모금은 천천히 삼킵니다. 술술 첫 장이 읽히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순간, 가늘고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귀에 꽂힙니다. “오빠, 저기 자리 있다” 그녀의 앙증맞은 가방이 내 옆의 의자 위에 놓이고 커플은 나란히 주문을 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갑니다. 나란히 자리에 앉아 서로의 소소한 일상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커피가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이야기보따리가 풀립니다. 어느새 봄햇살 같은 문장들이 봄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책을 보는 행위는 그저 적당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하는 딴짓에 불과해집니다. 나는 남은 와인을 비우고 연인들에게 널찍한 공간을 제공한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일어섭니다. 그리고 익선동에 있는 몇 번쯤 가본 적인 있는 수제 맥주집을 떠올립니다. 그곳에 가서 2차를 해야겠습니다. 달콤한 캐러멜 향이 나는 맥주의 이름이 사랑 어쩌고였던 로맨틱한 그 맥주를 나와 함께 천천히 음미할까 합니다.
오랜만에 나온 주말의 외출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조금은 들뜨고 조금은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오늘 나와한 주말의 약속으로 남은 반잔을 채워봅니다. 여러분들도 혼자 뭘 하나 그런 핑계 대신 ‘나와의 약속’으로 생각만 하던 그곳에서 ‘나’를 만나보시길. 만나러 가는 그 길 내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릴 나를 상상하면서 말이죠.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