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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반 컵 01화

프롤로그

by anego emi

반 컵입니다. 삶이 이 컵에 가득 채운 물이라면 저는 이미 반컵하고도 몇 방울을 더 마셔버린 샘입니다. 반컵의 물을 마시는 동안 무엇을 했느냐고요? 나름 많은 일들을 하고 많은 일들을 하지 않기도 했지요. 차츰차츰 그 이야기들은 한 알 한 알사탕 까듯이 펼쳐드리겠습니다.


남은 제 삶을 반 컵이라고 떠올리게 된 것은 30대의 유명 유튜브 덕분입니다. 어리다고 놀려서도 안되고 대충 봐서도 안된다는 것을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매일매일 느낍니다. 까도 까도 배울 것이 양파처럼 많은 이분은 자신이 스스로 터득한 비법들을 아낌없이 다양한 채널로 공개합니다. 결국 이분의 책까지 사보게 되었는데 그 책에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갔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만약 우리가 백 살까지 산다고 치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배터리는 100%가 된다. 그렇다면 엄마는 42%, 할머니는 18%가 남은 셈이다. 그러자 갑자기 뭉클 해지면서, 그분들과 보내는 시간을 미루지 말고 소중하게 써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에게 남은 배터리의 용량을 떠올리자 정신이 번쩍 났다고 했습니다. (절반 이상이나 남았으면서도 말이지요) 그리고 앞으로 더 열심히 신나게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책을 잠시 덮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노트북의 모니터, 그 맨꼭대기에 쭉 그어진 길쭉한 바 위에 배터리 모양의 아이콘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순간 섬뜩했습니다. 46%. 제게 남은 삶의 배터리 양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갑자기 서글퍼졌습니다.


그러다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용기를 냅니다. 그래, 너는 이제 반도 남지 않은 이 배터리로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 아니 무엇이 하고 싶은 게냐?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인지 멍해진 것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속이 타들어 갑니다. 정수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투명한 컵에 물을 가득 따르고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단숨에 반을 마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반쯤 남은 물 컵을 내 눈높이로 들어 올려 빤히 보다가 아하 하는 작은 탄성을 냅니다. 반 컵... 반 컵이나 남은 거잖아. 내 삶이… 그렇다면 반 컵을 무언가로 다시 채우면 되잖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로 그리고 내가 알고 싶고 만나고 사람들로… 조금 억지 같지만 제법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답니다.


해마다 물은 어차피 줄어들겠지만 그만큼 채워 넣은 것이 있다는 감각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 볼까 합니다. 인간은 수많은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으로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안에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또 다른 내 가 넘처나고 있는 데도 말이죠.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지 날마다 스스로에게 숙제를 내면서, 나의 무심함으로 미아가 된 또 다른 나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숙제 검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결과보다 숙제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리고 하루의 끝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남은 반 컵에 나를 위해 잘 채워 넣었습니다. 하고 말이죠. 이왕이면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채워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서로서로 애쓰며 사는 마음을 내가 네가 알아준다는 마음으로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워주듯이 말이죠.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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