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랑 Jan 15. 2020

단편_Coffee

윙-


무미건조한 소리, 기운 빠진 진동과 함께 갈빛 액체가 떨어진다. 식탁 한 켠에 굴러다니는 캡슐 하나만 던져넣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꽤나 그럴듯한 커피가 나온다. 건널목을 두 번 건너 커피 전문점에 가거나 가소로운 스탬프를 찍으러 프랜차이즈 카페에 갈 필요 없으니 편리한 세상이다. 아르페지오 디카… 뭐라고 하더라? 이름도 잘 모르겠다. 동네 김밥천국에 가도 메뉴를 고르지 못해 제일 맛있는 거 달라고 하는 나에게 수십가지 캡슐을 놓고 고르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싸구려 커피만 아니면 됐지 뭐.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고2때부터였다. 잠을 줄이고 공부하는 것이 미덕이고 점수만 잘 받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때, 그런 곳. 학원의 복도에는 파아란 물통이 거꾸로 꽂혀있는 정수기가 있었고, 옆의 탁자에는 맥심 커피믹스가 항상 놓여있었다. 잠이 안온다는 친구의 말에 처음 호기심이 생겼다. 한 잔, 딱히 효과가 없는 듯하여 내리 다섯 잔을 연거푸 마셨다. 한 시간 후 심장은 집앞 치킨집 오토바이가 내는 소리처럼 콩콩콩콩 뛰었고 머리는 홀린 듯이 눈 앞의 문제를 컴퓨터처럼 계산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스마트폰 배터리를 충전하듯 머리를 돌게 하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그 때의 커피믹스를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으니 입이 변한건지 내가 늙은건지 모르겠네. 


1500원짜리 이케아 머그잔에 담은 커피를 들고 책상에 앉는다. 모니터 화면에 새로운 메일 알림이 뜬다. 보나마나 수정사항이 잔뜩 담긴 폭탄이겠지. 머그잔을 기울여 한 모금 넘긴다. 카카오 향이 나네 아로마가 어쩌네 산미가 좋네 장황한 설명이 귀에 꽂힌 채로 카트에 던져넣었지만 뭐가 그리 잘났고 독특하고 특출난지 모르겠다. 스물몇살짜리 알바생이 무슨 커피맛을 알겠어? 그냥 외운거 줄줄 읊었겠지. 커피가 그냥 커피지 크레마가 어쩌고 바디감이 어쩌고 다 웃기는 짓거리 아니야? 


문득 떠오른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차를 좋아했던 사람. 믹스커피만 아니면 되는 나와 다르게 향, 찻잎, 원산지, 물 온도, 우려내는 도구까지 까다롭게 굴었던 사람. 급하게 때우는 식사도, 그렇고 그런 헐리웃 영화 한 편에도, 시덥잖은 양산형 대학로 연극 한 편을 보아도 내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조마조마 했던 사람. 이렇게 무딘 나도 그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그윽했던 사람. 그 향기에 묻혀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사람.

결국 나의 무심함과 그의 세심함이 우리를 갈라놓았지. 


수 년이 지났지만 왜 난 아직 그대로인지, 바랬던 그런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시크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왜 맨날 틱틱거리기만 하는지, 거울을 볼 때마다 도끼눈을 하고 있는지, 남들에게 무신경하게 대하는지, 감정이 좀 유연해질 수는 없는지, 철없는 생각만 하고 다니는지, 이런 나를 받아줄 사람은 있는지 모르겠어.


커피 향기가 몸에 스밀 때마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휘몰아친다. 잘난 맛에 사는 나인데. 너무나 오랫동안 담금질을 해 강철같이 단단하고 파리가 앉아도 미끌어질 것만 같은 마음인데. 그 사람이 일으킨 지진은 멈추지를 않는다. 다시 돌아가면 흔들림과 진동과 울림과 떨림이 멎을 수 있을까.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나인데, 이러고 있는것도 웃기네. B급 로맨스코미디 영화같잖아. 

마지막 한 모금에 의문과 후회와 잡념과 슬픔을 고이 담아 깨끗하게 넘긴다.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커피맛을 모르겠어.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_괴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