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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현 Dec 11. 2020

왜 사람들이 영어로만 말해?

외국어, 그게 뭐라고

멕시코에 가는 것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들의 학교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집 주변에서 괜찮은 학교는 영어만 100프로 사용하는 국제학교, 영어와 스페인어를 반반씩 사용하는 사립학교 두 종류로 나눠졌다. 나는 사립학교에 끌렸다. 멕시코에서 4~5년간 생활하게 될 텐데 아이들이 이 곳에 사는 동안 현지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스페인어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학비도 국제학교에 비해 저렴했다. 사립학교로 마음을 결정하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이곳에 있는 한국인들의 선택은 대부분 영어만 사용하는 국제학교였다. 정답을 맞추지 못한 기분이었다. 왜 스페인어 배우면 안되는거지?  


오답노트를 만드는 심정으로 나는 3개 국어에 노출된 어린이들의 사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다국어' 같은 키워드를 넣고 무작정 검색, 나오는 책 중에 끌리는 것 몇 권을 사서 집으로 왔다 밑줄까지 쳐가며 입시공부를 하듯 읽기 시작했다. 공부를 할수록 복잡해졌다. 아빠랑은 스페인어만, 엄마랑은 영어로만, 학교에서는 한국어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책 속에 등장하는 부모들의 열정과 노력은 엄청났다. 더욱 답답해진 마음으로 어린이집 선생님이며 육아 선배 등을 찾아가 고민 상담을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결국 '영어'였다. "영어도 못하면서 스페인어는 배워서 뭐 하게?" 


영어열풍. 아이들이 많이 사는 우리 동네에는 영어학원이 널렸다. 재미삼아 세어보니 10층짜리 상가 건물에 영어학원만 9개. 한 층에 영어학원 1개는 있다는 거다. 학원에서 보는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다른 학원에 다닌다는 말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4살부터 모집하는 유명 영어유치원에는 등록하려고 대기하는 사람만 100명이 있었다. 영어가 대체 뭐길래. 


외국에서 4년간의 주재원 생활을 하고 돌아간 9살 지아는 한국의 영어학원에 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 학원에서 나눠 준 시험지는 하나도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아는 아직 지문을 읽지도 않았는데 친구들은 모두 문제를 다 풀었다고 했다. 단어 시험을 볼 때도 선생님이 단어를 다 부르기도 전에 아이들이 답을 적었다. 심지어 거의 모든 아이들이 100점이었다. 5살부터 영어유치원에서 갈고 닦아 온 지문읽고 문제 푸는 스킬, 단어 암기하는 스킬이 몸에 베어있었던 까닭이었다. 지아는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외국 아이들과는 막힘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런건 한국 영어학원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지아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한다고 했다. 그곳은 '교육의 도시' 대치동도 목동도 아니었다. 아주 평범하고 평화로운 서울의 한 동네였다. 


고심 끝에 나는 영어에 특화된 국제학교에 등록했다. 심지어 학부모의 추천으로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놀이터 도장깨기를 하고 수영이나 달리기를 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아이가 국제학교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엄마였다. 영어를 외면하기에 나는 너무 불안한 엄마였다.    

5살 딸 아이가 본인의 영어 이름을 쓴 연습장


"엄마 여긴 멕시코인데 왜 사람들이 영어로만 말해?" 

국제학교를 몇달 다니던 아이가 물었다. 아이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혼자 영어를 배우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영어를 배울수록 아이가 살고 있는 멕시코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에서도 점점 멀어졌다. 한국어 단어 뜻을 물어보는 횟수가 늘어났고 영어 단어를 말해주면 이해했다. 이게 맞는 건가. 가끔 혼란스러웠다. 


아이의 인생을 대신 결정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이 옆에서 스스로 인생을 가꿔나갈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조력자 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내가 낳은 아이가 옆집 아이보다 숫자를 잘 읽으면 뿌듯하고 한글이 더디면 초조해지더니, 영어 열풍에 뒤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건강하고 밝은 아이로 자라길 바라던 나였는데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영어 공부에 집착하는 극성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이의 영어 숙제를 도와주다가 책을 덮고 부엌으로 가서 미역국을 끓였다. 오늘은 특별히 미역국에 소고기를 더 듬뿍 넣었다 건강하게 잘 크면 됐지 공부는 때가 되면 아이가 해야 할 영역이지라고 합리화하면서. 아무래도 나는 ‘극성 엄마’와 ‘쿨한 엄마’ 사이에서 한동안 방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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