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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Mar 01. 2019

엉덩이는 왜 뜨거운가
(버닝 2018)

영화 속 '노래' 돋보기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어요~ 엄마아, 엄마야~ 엉덩이가 뜨거워~” 해미를 만난 뒤, 본가로 들어온 종수가 농가일 을 하며 부르는 노래. 동요계의 고전이자 스테디 송, ‘어린 송아지’다. 


 영화 버닝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소재는 ‘미스터리’다. 영화 초반부터 확신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어린 시절 동창이라고 낯선 친구 해미와 그녀의 고양이, 우물의 존재, 발신인 불명의 전화 등 평범한 24살의 청년 종수를 둘러싼 의문의 사건들. 그것들은 사회 속에서 청춘이라는 위치가 지니는 불안과 불확실성을 나타낸다.

 

 영화 버닝은 불타는 것을 다룬다. 이는 영화 속 ‘벤’의 말처럼 일종의 메타포다. 이러한 은유를 빌려 영화는 주체성과 수동성에 대해 말한다.


 종수를 둘러싼 불가피한 사건 외에, 종수는 그 스스로 역시 모르겠는 것이 많다. 한국에 ‘벤’ 같은 개츠비들이 많은 것도 모르겠고, 소설가인 자신도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 가득한 데, 그나마 통제 가능한 것 역시 통제하지 못한다. 그런 종수는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 헤매는 청춘을 대변한다. 


 해미와 벤과의 만남 뒤에 종수는 정적인 일상에 변화를 느낀다.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 종수는 오랜만에 활력을 느낀다. 그러나 그 활력의 출처는 정확히 어디인지 모른다. 기억이 나질 않는 어릴 적 친구 혜미와의 만남, 마치 자위를 하듯 기계적으로 나눈 그녀와의 정사. 모두 종수에게 즐거움을 주기엔 어딘가 모자란 것들이다. 그런데도 종수는 즐겁다고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루지 못할 만족이라서 일까. 종수는 근원이 불분명한 것들을 밝히는 대신, 즐거운 양 어린 송아지 노래를 흥얼거린다.  동요 속의 어린 송아지가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뜨겁다고 울부짖는 것처럼 말이다. 


 자위는 그런 종수가 그나마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한 가지다. 종수에게 자위는 단순히 육체적 쾌락의 의미를 넘어선다.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유일한 도구이자, 자신이 원할 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위이다. 종수에게 자위는 확정적이지 않고 불안한 세계에서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탈출구를 나선 순간 그 밑에는 또 다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다. 짧은 쾌락과 욕구 해소 뒤 밀려오는 공허감. 종수가 처한 늪 같은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해미가 사라지면서, 종수는 불확실한 것들을 해소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 준다. 해미 가족, 친엄마를 만나 우물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해미의 행방에 대해 파헤친다. 헉헉거리고 땀을 흘리며 비닐하우스를 체크하고, 벤이 그녀를 죽였다는 심증을 굳혀간다. 종수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동시에 ‘무엇을 쓸지’ 알게 된다. 벤을 죽이러 가기 전 종수는 전처럼 해미의 방에서 자위를 하는 대신, 무엇을 쓸지 몰라서 못 썼던 그 소설을 쓴다. 그제야 종수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벤은 종수와 혜미 같은 이름 모를 청춘과는 다르다. 이 둘이 수동적인 ‘태워지는’ 인물이라면, 벤은 ‘태우는’ 인물이다. 부유하며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다닌다. 또한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여자들을 없애는 불법적인 일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다. 벤을 죽이고 난 종수는 벤의 피가 묻은 옷을 벗는다. 그리고 죽은 벤과 함께 태운다. 태워지는 것이 아니라 ‘태우는 주체’로 거듭나는 그의 재탄생을 보는 듯하다.  스스로를 불로 태우고 다시 살아나는 피닉스는 삶을 온전히 통제한다. 자신의 옷가지를, 직접 단죄한 벤과 함께 태운 종수 역시 스스로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마치 삶과 죽음을 완벽히 통제하는 전설의 동물 피닉스처럼. 그렇게 태워지는(burned) 것이 아니라 태운다.(burning)


 다시 태어난 종수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알몸으로 덜덜 떨며 차 안에 들어간 종수의 후일담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는다. 종수의 아버지는 끝까지 자기 고집을 부리며 사소한 일을 키우는 인물이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어쩌면 종수 역시 그런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건지도 모른다.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무엇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사랑하고 싶지만, 자위에 그친다. 


 영화는 청춘을 그린다. 에너지가 넘치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그렇게 에너지를 낭비하고 주체를 잃어간다. 그러나 영화는 청춘만을 말하진 않는다. 인간 본질.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 설명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동어 반복에 그치는 현상들. 그렇게 영화는 인간이 가지는 본질적 모순에 대해 폭로한다.


 엉덩이가 뜨거운 이유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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