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and Jul 18. 2018

세계의 기둥(김씨 표류기 2009)  

영화 속 '관계' 돋보기

 

#문제

1. ‘가가가가가?’는 어떤 의미인가?

① 그 아이 성이 가씨가?

② 성이 가씨인 사람이 그 사람이었나?

③ 그 사람? 그 사람이 그 사람이냐?

④ 성이 가씨인 그 아이가 가가 가져가

⑤ 그리로 걸어가서 가가 가져가라


 어느 정도 경상도 방언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1번부터 5번까지 ‘가가 가가가?’, ‘가가가 가가?’, ‘가? 가가 가가?’, ‘가가 가 가가’, ‘가가가 가가’ 이런 식으로 호흡을 주고 억양을 넣어보자. 이제야 비로소 의미가 전달된다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 확정적이지 않다. 같은 언어권이라 할지라도 지역, 억양과 높낮이, 발화되는 상황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다른 의미를 가진다. 언어가 이러할진대, 사람 사는 모습은 얼마만큼 다양한 모습과 의미가 존재할 것이다. 정말 그런가? 여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2. ‘는 2억 가량 빚이 있으며갚을 방법이 없다딱히 꿈도 없고 무능하며 얼마 전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 ‘는 어찌해야 할까. (정답은 꼭 1개가 아님.)

① 한강에 뛰어내린다.

② 63 빌딩에서 뛰어내린다. 

③ 나무에 목을 맨다. 

④ 세상에 복수한다. 

⑤ 괜찮다. 삶의 이유를 찾고 희망을 찾고 주체적으로 살아 본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4,5번은 현실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 그나마 1, 2, 3번이 무난한 모범답안이다. 




# '가가가가가'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

 무난한 모범답안을 선택한 남자 김 씨. 그는 모범시민이다. 원하지 않는 공부, 원하지 않는 직업을 향해 바 등거리며 모범적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살다가 역시 모범답안을 골랐다. 한강에 뛰어내리기다. 이로써 남자는 세계를 잃어버린다. 남자가 없어진 세계는 남자의 죽음을 빌려 말할 것이다. ‘더 열심히, 내 기준에 맞춰 살아라.’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 노력과 부조리가 동시에 작용하는 세계. 그 세계의 질서와 기준은 다른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세계에서 남자 김 씨가 한강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그리 안타깝지도, 의문이 들지도 않는 통과의례다. 맥락과 분위기,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는 세계. 일관된 기준에 맞출 수 없다면 퇴장하는 것. 이 세계의 모범답안이다. ‘가가가가가?’를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영화는 의문을 제기한다. 새로운 가능성은 없을까? 영화는 남자를 살려 밤섬으로 보낸다. 남자가 찾아낸 가능한 대답. ‘죽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는 비로소 제 것이지만 제 것이 아니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권리를 찾는다. 그렇게 밤섬에 표류하게 된 남자. 섬을 둘러보고, 옥수수를 심는 등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해 나간다. 그제 서야, ‘왜’ 일하는지 알게 된다. ‘짜장면’이 너무 먹고 싶어서다.  남자의 이유는 전의 그 세계에서는 지질하고, 터무니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세계에 들어가면, 공감하게 된다. 그 남자가 짜장면 3그릇을 거절한 이유를, 눈물을 흘리며 짜장면을 먹은 이유를 말이다. 삶을 버리고 나서야 왜 사는지 알게 된 남자. 그렇게 그는 자신의 세계를 찾았다. 


 여기 또 다른 김 씨 여자가 있다. 역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여자. 그러나 그 세계는 남자의 세계와는 또 다르다. 세상에 낙오당한 것은 같지만, 여자는 남자와 달리 자신이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세상을 아직도 동경한다. 매일 같은 시간 일어나, 같은 시간 잠들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려 노력한다.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인터넷 세상에서 자신을 창조하고 만들어 낸다. 세상에서 괴리된 그녀는 여전히 세계를 동경한다. 그러다 한 남자를 발견한다. 밤섬에 표류하게 된 남자 김 씨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주체적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는 것을 보게 된다. 


 그녀는 동경하던 인터넷 세상의 자신을 버리고, 진짜 자신을 찾는다. 진짜 삶에서 삶의 이유와 동기를 찾는다. 그를 관찰하고 그와 소통하는 것. 그들이 창조한 세계는 그들의 시점을 통해 자주 보인다. 밤섬을 탐험하는 남자의 시점은 카메라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고, 남자를 관찰하는 그녀의 시점은 카메라의 렌즈를 매개로 나타내 진다. 이로써 관객은 남자, 여자의 세계를 단순히 관음 하기보다 주인공의 시점을 빌려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남자가 옥수수를 키우는 것을 본 뒤 여자 역시 옥수수 통조림 대신, 직접 옥수수를 키운다. ‘이유’를 찾은 것을 넘어서 누군가의 이유가 된 남자. 그는 위대한가. 그렇지 않다. 그녀가 그를 동경한다고 해서 그가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며, 어떤 세상이 더 우월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근거도 될 수 없다. 단지 서로 영향을 주었을 뿐.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남자의 세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제도권 안의 사람들에 의해 다시 낙오자라는 명찰을 달고 세상으로 복귀한다. 빚쟁이라는 명찰. 이에 어울리는 행동은 영화 초반에 했던 ‘뛰어내리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닮은 남자.  세속의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죽음으로 나아간다. 세상을 창조한 그, 그는 그 자체로 위대하지 않다. 


 다시 여자의 세계. 그녀는 달린다. 처음으로 현실로 다가온, 그녀 자신만의 이유를 위해. 그녀가 다시 뛰어나온 세상은 더 이상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집에 있는 그대로, 자신의 방에 갇혀 있던 그 모습으로, 그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그를 놓치기 직전, 운명처럼 들리는 사이렌 소리. 민방위 훈련이다. 그녀 세계에 존재하던 ‘기회’의 시간이다. 그녀만의 세상에 존재하던 법칙이 실제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마침내 융화된 세계에서 다른 누군가의 이유가 아닌 그녀만의 이유, ‘털 나고 지저분하고 빚지고 보잘것없는 남자.’를 찾게 된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하나의 가능성이다. 서로의 세계는 서로 연결되었을 때. 존재하고 확장하는 에너지를 얻게 된다. 관계라는 동력. 관계는 서로의 세계를 확장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당신과 나를 살게 하는 힘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가가가가가’를 아무리 외쳐봤자, 이를 들어줄 사람, 이해해줄 사람이 없으면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함부로 확정하고 재단하는 세상의 법칙, 그 틈을 파고드는 힘은 서로의 세계를 인정해주고 그만의 언어를 경청해주는 타인의 존재로부터 나온다. 단 하나의 기둥으로는 세계를 지탱하기 벅차다.



이전 02화 차별의 언덕(디스트릭트9 2009)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