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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Jul 03. 2018

차별의 언덕(디스트릭트9 2009)

영화 속 그냥저냥 돋보기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  벌레만도 못한 아들이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그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다. 그는 성실히 일했고, 가족들을 먹여 살렸으나, 변한 뒤에는 가족에게 학대받으며 고통 속에 죽어간다. 겉모습이 달라졌지만, 인격은 그대로 남아있었던 그였다. 그가 고통 속에 죽어갈 때, 그의 가족은 즐겁게 나들이를 떠난다. 가족들이 사이코패스여서는 아닐 것이다. 단지 그들에게 그레고르는 더 이상 아들이나 오빠가 아니었다. 벌레의 탈을 쓴 인간.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디스트릭트 9의 비커스 역시 무관심 속에 사라져 간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비커스의 외모는 외계 생물체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겉모습이 변하는 비커스의 인격은 그대로다. 인간의 사고를 하며, 기억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은 반응은 그렇지 못하다. 그의 달라진 겉모습이 그를 재규정한다. 거짓은 겉모습을 통한 재규정으로 사실이 된다. 비커스가 겪은 불의의 ‘사고’는 프론과의 ‘간음’으로 탈바꿈되고, 그를 향한 동정은 혐오로 바뀐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좌지우지하게 돼버린다. 



 사람은 거울 속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때문에 타자의 시선을 이해하고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타자의 역할 역시 매우 크다. 이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의 개인은 타자의 시선과 즉자적 존재가 결합한 형태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그 우선순위를 엄밀히 따진다면, 즉자적 존재가 우선한다. 인간이 거울 속 자신을 객관적으로 깨닫는 시기는 생후 12-16개월 무렵이다. 인간은 그 역시 동물적 개체로 즉자로 존재한 뒤, 타자로서의 자아를 인식하는 것이다.



 디스트릭트 9의 비커스는 변하는 과정에서 타자의 시선에 의한 폭력을 당한다. 역설적으로 그 같은 경험을 통해 비커스는 성장하고, 새로운 즉자적 존재의 인격을 가지게 된다. 외부의 변화가 내적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겉모습이 변하고 외부에서 자신을 재규정하는 것은 폭압적이며 왜곡된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불합리한 타자의 시선은 비커스 내부의 진실한 변화를 이끌어 냈다. 프론을 진정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즉자의 변화다.      


 생체실험을 겪고, 끔찍한 사실들과 마주하며 비커스는 프론과, 인류가 공유하는 통합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성장한다. 그러나 통합의 과정은 험난하다. 모두에게 배제당하는 중간적 존재를 경험함과 동시에, 외계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MNU와 갱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이때 필요는 타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바탕으로 한 ‘각자의 필요’다. 공감과 유대를 배제한, 다른 쪽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집착과 강박을 바탕으로 한다.   


 완벽하게 프론으로 변화한 비커스는 프론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공감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겉모습에서 느끼는 동질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모든 유기체라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생명 존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단순히 겉모습이 같은 1차원적인 동류의식이 아니다. 동물뿐 아니라 벌레, 식물 등의 모든 유기체를 아우르는 통합적 가치다.



 완전히 변해버린 비커스의 몸에는 인간의 인격이 남아 있으며 또한 프론의 인격이 공존한다. 이상향에 가까운 통합적 개체다. 그러나 그런 비커스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수많은 프론 중에 하나로 남게 된다. 결국 이상적인 통합의 존재로 성장한 비커스는 역으로 어디에게도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된다. 차별과 배제를 바탕으로 한 집단에서 평화와 공존의 가치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디스트릭트 9는 주인공 비커스를 중심으로 한 영웅 서사를 그린다. 외계 생물체라는 타인과 인간이라는 배타적인 존재의 완벽한 결합. 그야말로 영웅이며 험난한 여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 결말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통합적 가치를 목격한 개인은 편견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며 고립된다. 세상이 영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1863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을 했다. 그리고 백 년 후인 1963년, 마틴 루터 킹은 말한다. ‘변한 것이 없다.’고 차별과 배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스테디 이슈’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가게에서 쫓겨나고, 피난 중 2살짜리 어린아이가 정부군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09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와 닿는 이유다. 


 지금, 바로 한국의 현실과도 접점을 지닌다. 얼마 전 예맨 난민 500여 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 법무부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난민뿐 아니라, 외국인을 향한 무분별한 차별과 배제의 시선이 넘쳐나고 있다. 


 "그들은 폭력과 강간을 일삼는다. 결국에는 나라가 넘어갈 것이다. 테러범들을 추방해야 한다." 

 몇 세기가 흘러야 인간은 '탈'이 아니라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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