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철철 고대 신입생ㅡ첫 도전 성공 만끽하다
5화. 실패로 본 성공 비법ㅡ서울대의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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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보면 잡아라.
성공을 만끽하라.
늦빠. 늦었을 때가 빠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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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에서 지하 막장으로 스스로를 팽개친 청춘은 기회를 보았고, 도전했고, 2년만에 지상으로 오른다. 뒤늦은 청춘의 낭만을 마음껏 구가한다.
성대 야간대학 무역학과 1학년을 마친다. 80년. 대입 제도 뿌리가 바뀐다. 본고사 폐지 그리고 대입 정원 두 배 확대. 앗, 기회다. 고3 1년 내내 심히 헤메느라 본고사 준비 하나 못 해서 고대 낙방한 거지 사지선다쯤이야. 고2까지 늘 탑에서 놀았기에 기본 실력 탄탄에 학습법 익히 안다. 2학년 1학기 등록금 납부한 거 날리고 명륜동 하숙집 나와 신촌 대흥동 숙식 독서실. 반 년여 과목별 훑고 지금의 수능인 학력고사 치룬다. 고대 영문과 합격. 고2 때 서울대의대급 실력에 비해 약소하나마 일단 지하 탈출에 만족하고 즐기기로. 원래 나답게, 게다가 문학과 아닌가.
● 낭만은 술이여
고려대학교 막걸리 대학교. 술고래 대학교. 첫 원고 동문회. 선배는 커다란 냉면 스텐 그릇에 막걸리 넘치게 따라준다. 입 떼지 말고 다 들이키라고. 입 대는 순간 모두가 합창. 막걸리 찬가. 마셔도 사내답게 막거리를 마시자. 맥주는 싱거우니 신촌골로 돌려라. 부어라 마셔라 막걸리. 취하도록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다 같이 마시자. 고려대학교 막걸리 대학교. 아 고려대학교 막걸리 대학교 만주 땅은 우리 것. 태평양도 양보 못 한다. 캬 쥑인다. 대번 콸콸 토하지만 그래 바로 이거야. 그날부터다. 매일 부어라 마셔라. 소주 추가. 카페서 병 맥주. 안주는 없거나 양 많은 두부찌개, 버리는 걸 손질해 무쟈게 싼 닭곱창, 예쁜 여사장 카페는 공짜 뻥튀기나 가끔 마른 안주. 단골집 둘. 골목에 고모집과 대로변 하얀집. 출근 도장 찍으니 외상. 몇 달 이러니 속 뒤집혀 누런 위액까지 올린다. 밤새 배 몹시 아프다. 다신 술 안 마신다 다짐하곤 다음날 오후면 멀쩡. 저녁이면 다시 부어라 마셔라 무한 반복. 그대로면 술병 나서 폐인될 수도 있었으나...
와룡루. 성대 왼쪽 주택가. 2층 옥상 원룸. 그곳에 술 먹는 용이 쌍으로 살았다. 원고 선배 둘. 소주를 하룻밤 한 짝 20병 비우는. 거의 매일. 고대 독문과, 연대. 몇 해 위. 누각에 오르면 천하가 넷의 것. 난 술 약해 일껏 늘린 게 3병이면 깨꼬닥. 형 둘은 신선이었다. 한 분은 술로 인해 폐인되었다. 한 분은 그럭저럭
● 낭만은 자유여
민족 고대에 서양 예수님 출현. 입시 전부터 이발 안 하고 머리 기른 채 입학. 문과대 학생답게. 반곱슬 구불구불 어깨까지 치렁. 원단 구렛나루 덥수룩. 마대자루 닮은 커단 가방 메고 어슬렁어슬렁. 문과대 앞. 친구와 걷는데 마주오던 웬 여자가 거의 90도 깍듯이 내게 인사. 누구? 우리 과 아니고? 교양 수업인가 들어가니 그녀가 강의. 나를 교수님으로 봤던 거. 처음 대학 강사로 발령 받았던 거. 여기는 문과대학. 문학, 철학을 논하는 곳. 다들 단정한데 나만 그러고 다니니까 오인할 법도. 내가 나이보다 많이 노숙해 보이는 데다가 예수님 행색이라 신입생인 나를 교수님으로 보았던 거. 서지문 교수님. 지금 검색해보니 1948년생. 나보다 13살 위. 82년부터 고대 영문학과 교수. 81년 봄 일이니까 그땐 시간 강사나 테스트였거나. 교수님 그때 죄송했어요. 예수님처럼 다녀서요. 일부러는 아니구요. 제가 한 인물 하다보니ㅎㅎㅎ
반년여. 머리 길었을 뿐 아니라 감지도 않는다. 가렵다. 점점 가렵다. 두어 달이면 특이점이 온다. 덜 가렵다. 안 가렵다. 아무렇지 않다. 때가 쌓이다가 굳은 거. 가려움은 실종되지만 비듬은 는다. 허연 가루를 어깨에서 털어내지 않으면 눈처럼 쌓인다. 이마저 무시. 그럼 지저분한 예수님 된다. 단 인물, 키 받쳐줘야. 섣불리 따라하면 노숙자. 시균아 왜 그랬어? 문과대학이잖아. 것다가 영문학과. 영어 회화 아니거든. 소설, 시 공부하는 곳. 문학의 기본이 돼 있어야지. 청춘이 말끔 단정해서 문학이 되겠어?자세가 글러먹은 거ㅋㅋㅋ
종로길. 인도 5미터마다 전경. 날마다 시위 데모. 서울시 한가운데서 집중 검문 검색. 친구들과 걸으면 꼭 나만 붙든다. 충성,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신분증 달라. 학생증. 가방 샅샅이 뒤진다. 소설 몇 권과 담배, 라이터. 잡아가려고 찾는 불온 서적 이런 거 없다. 가방 구석에 쌓인 비듬. 이건 구속 사유 아니다. 통과. 좀 걷다 보면 또 충성. 아, 쫌 그만 충성해. 길 좀 가자 길 좀 가. 짜증나. 나라 엎을 주모자급으로 보는 눈들은 바른 거ㅋㅋㅋ
해서 걸기적대는 게 많아서 단발. 머리 감을 때 이발소 아가씨에게 손톱 말고요. 솔로 벅벅 긁어 주세요. 더요, 더 세게요, 더 더. 야아, 이리 시원할 줄이야. 구렛나루, 턱 콧수염 싹 다 밀고나니 거울이 광채 튕겨내 번쩍번쩍. 예수님에서 대한의 청년으로 복귀. 그때 아가씨 고마워유. 묵은 때 벗겨달라 해 미안해유ㅋㅋㅋ
단발 첫날. 학교 정문 통과. 저 멀리서 뭐라 뭐라. 처음엔 몰랐다. 칠팔십 미터 가니 누가 나를 보고 추웅서엉. 아유, 깜짝이야. 엄청나게 큰소리. 우로 보니 내게 거수 경례. 그러니까 정문 앞에 나를 발견하고 충성 경례 자세로 그 자리에 붙박이로 계셨던 거. 오 보전 쯤서 다시 경례한 거. 아, 학군단 신입이구나. 머리 짧으니 나를 학군단 선배로 잘못 안 거. 아직 학군단 초기라 선배 구분 못 하는 거. 허긴 나가 고3 연대장 아니었나. 태권도 유단자. 교문 밖 저녁이면 해롱이나 낮 교내 맨정신 보무당당. 게다가 매일 세수 머리 감으니 영혼까지 말끔한 느낌. 더욱이 예수님 버금 미남에다가 중앙 코 우람 솟고 부처님 귓볼에 양 눈매 끝 살짝 처진 인자상. 아, 귓볼은 못 봤겠군. 군기 바짝 들어 학군 선배 그림자도 못 밟는데 무슨 그거까지 보랴. 그렇게나 무한 존경을 표하는 녀석에게 아니라고 부정하자니 얼마나 무안할까. 가볍게 오른손 접었다 폈다로 퉁치며 예수 부처 인자 삼위일체답게 녀석 자존심을 지켜준다. 지나면서 돌아보니 여전히 그 자세로 몸은 내 방향. 두어 달 이랬다. 그 사이 머리 자라고 녀석들도 지들 선배 얼굴 가리게 되고. 단발머리 호사는 아쉽게 지났다는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머리 기르면 여교수가 90도 인사, 교문 나서면 전경이 충성. 자르면 학군단이 추웅서엉. 내가 이렇게 잘 생긴 거? 멋진 남자인 거?지금이면 길거리 캐스팅인 거? 소도둑으로 봤을지도ㅋㅋㅋㅋㅋ
● 낭만은 평화여
여름날. 언덕배기에 라일락 나무 일렬. 본관 앞. 마주보고 왼편으로. 전날 술에 익은 몸이 오후면 풀린다. 벤치 셋. 운동장쪽 끝이 내 고정석. 예수님께서 몸을 뉘인다. 나뭇잎 틈으로 푸른 하늘을 본다. 가방에서 책 두 권. 중앙도서관서 빌렸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가방에 든 한 권은 머리에 베고 한 권을 펼친다. 사랑의 서사가 푸른 라일락 잎도 하늘도 가린다. 모로 누워 보다가. 엎드렸다가. 다시 원 자세 했다가. 책 속에 빠지다보면 수업 시간. 대개는 빼먹지만. 라일락 뒤편 경사로를 오르면 바로 문과대학. 김용옥 교수의 도덕경. 원주서 청량리역 열차 안에서 리포트 쓰고. 교수님은 입이 걸었다. 한 번은 강의하다 말고 제일 앞줄 여학생에게 야, 너때문에 꼴려서 수업 못 하겠다. 나가 주면 고맙겠다. 미니스커트라 밑이 보이니 집중이 안 되었던 거. 교수님도 젊을 때고 철학과 교수라 그정도는 애교로 봐주던 시대. 테레비 강연, 요즘 유튭 보면 똑같다. 흰 한복 차림이나 어투나 거리낌 없는 거나 열강하느라 침 튀기시는 거나. 대강당은 영시. 몇 백 명이 듣는다. 고어가 섞인 영어 시라서 만만찮은데 인기인 건 학점을 잘 준다는 소문. 그건 교수님이 잘하는 거. 우리말 시도 쉽지 않은데 영시, 것도 고어라니. 학점 짜면 아무도 수강 신청 안 할 수도. 정반대. 제일 큰 대강당 강의실이 늘 꽉 차니 키 작아도 당찬 듯 어리숙한 듯 허허실실 교수님은 시의 라임에 빠져 므흣하시다.
라일락 나무서 잎이 나고 꽃 피고 지고. 나의 캠퍼스 라이프는 라일락과 함께라서 빛이 났다
● 낭만은 축제여
대학 축제. 이거이 낭만의 꽃중에 꽃. 운동장에 대형 무대. 유명 가수 부르고. 본관 앞 줄러리 먹거리 막걸리 학생들 팔고. 나 태권도 동아리
태권도부 격파 시범 공연.
축제를 위해 처음 만난 녀 초대. 문과대학 아래로 대강당. 영시와 학생들이 출렁이더니 오늘은 축제를 즐기러 온 청춘남녀 수백 명으로 좌석은 물론 통로까지 꽉 들어찼다. 정면에 높은 무대로 흰 도복에 검은띠를 허리에 맨 신입생 넷이 일렬로 입장. 객석을 보고 도열. 난 세번 째. 각기 기왓장 10장씩 쌓아 앞에 대령.
1번 정권 격파
2번 수도 격파
3번 팔꿈치 격파 나
4번 이마 격파
정중히 관객에게 인사. 의례적인 박수.
격파! 사회자의 구령과 함께 넷이
야압!
기합과 동시 격파. 셋은 10장이 무너져내리며 박살나 가루가 된다.
허나 난 석 장만 깨지고 일곱 장 멀쩡. 수백 명이 시선 집중. 조용히 나 하나만 빤히 쳐다본다. 나 혼자서 다시 자세 잡고 기를 끌어 모아서
야아압!
두 장 더 깨지고 다섯 장은 또 멀쩡. 아, 쓰벌. 딴 녀석들은 사실 흰띠 초짜인데 가라로 검은띠 맨 거구 난 짜루 검은띠인데 왜 안 깨지지? 어제 기왓장을 미리 가져다 놓고 물을 계속 뿌려서 푸석한 건데. 심지어 이마빡 격파는 갓 찍어낸 거라 깨지기는커녕 슬쩍 대기만 해도 원래 모래 상태로 흩어진 건데. 그걸 미리 다 알고 무대에 오른 건데. 쓰벌. 내 꺼만 돌처럼 단단히 굳은 걸 갖다 놓은 거. 햇볕에 제대로 말린 건 한 장도 단단하지만 10장을 쌓으면 더하기 열 아니라 수십 배 강도라 태권도 9단에 격파의 달인도 어려운데. 아침에 관리를 못해 10장 통째로 부서진 거 대신 긴급히 최강의 강도로 대체하고 내게는 알려주지 않았던 거. 검은띠니까 믿은 건지, 신입생이라 우습게 본 건지 이유를 따질 계제는 못 되고. 바짝 긴장. 짜고 치는 고스톱에 왕독박임을 알 길 없는 관중은 시선 집중해 나만 빤히 쳐다 보며 덩달아 긴장 반 애처로움 반. 사회자는 그만하고 내려가라 손짓하고. 가짜 검은띠 셋도 나때문에 무대에서 못 내려가고. 위기다. 허나, 나가 누구인가. 유일한 검은띠인데 이대로 물러서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부랄 찬 싸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끝장을 봐야하는 거. 촌놈이라 무식하지만 맡긴 일은 끝까지 책임진다. 세번 째 폼 다시 잡고, 이번에는 허공에 붕 떴다가 아래로 내려 오면서 팔꿈치에 힘을 실어서
야아아압!
그래도 세 장 또 남은 거. 이미 깨진 다섯 장이 쌓여 충격 전달이 안 된다. 관중들은 참다못해 낄낄 웃고, 파트너 내려다 보니까 얼굴이 사색. 아우웃, 열받어. 폼이고 머고 생략하고는 오른 발 높이 처들어서
쿵쿵!
당황해서 그런가 자세가 어정쩡해 그런가 발바닥에 힘이 안 실려 그런가 남은 두 장이 그래도 버틴다. 에라이, 관중이고 머고 파트너고 머고 최후의 결단. 두 발로 기왓장 더미 위를 딛고 오른다. 그리고 온몸 솟구쳐 잔뜩 체중을 실어서 양발로,
쾅쾅쾅! 우지끈 쿵쾅!
완전 개박살. 위에서부터 아래 마지막 기왓장까지 산산조각. 순간, 강당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초조와 연민과 불안의 삼중 피아노선이 일거에 뚝 끊기면서 관중석에서 천장을 날릴 듯한 환호와 박수 갈채가 터져 나온다.
사회자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다 함께 차렷, 인사!
넷이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하니 다시 나를 향해 우뢰 같은 박수에다 엄지 척에 바람 센 휘파람까지 난리다. 속으로, 그래, 바로 이런 맛이지. 격파란. 무대에서 내려와 파트너 녀를 만나니 만면에 웃음이 가득 방글방글.
그리하여, 녀와 우히히히
그날 온몸으로 격파 시범은 대학 태권도부의 신화가 되었다.
● 낭만은 정의여
가을 고연전. 이 해부터다. 연고전을 고연전이라고. 한 해씩 번갈아 부르기로 했다나. 야구 경기 끝나고 서울 한가운데 양교 학생들 명동 집결해 시위. 그날 저녁. 태권도부 회식.1학년 영문과 둘이 무용담. 들어보니 야구 끝나고 명동 골목에서 둘이 연대생 한 명 흠씬 팼다고. 게임 진 거 복수했다고. 관장인 복학생이 잘했다고 칭찬. 아니, 그게 자랑할 일? 그걸 또 칭찬? 깡패 ㅅㄲ들이군. 탈퇴. 도장 안 나가니 영문과 졸병 둘이 나 졸졸 따라다닌다. 도장 가잔다. 탈퇴하려면 빠따 맞아야 한다고. 그게 뭔데?들어보니 그냥 때리는 거 아니다. 초죽음. 미쳤냐 안 가. 내 수업 끝나면 문에서 대기. 나 잡아간다고. 이게 무슨. 둘은 신입생, 나는 햇수로 삼수. 2년 동생뻘. 아직 똥오줌 못 가릴 때. 안 되겠다. 관장 찾아간다. 독대
선배님, 저 태권도부 싫습니다. 얘들 자꾸 보내지 마십시요. 저 삼수. 알 만큼 알거든요
왜 태권도부 탈퇴하려는데?
물으니까 묻겠습니다. 솔직히 얘기해도 됩니까? 안 하는 게 서로 좋을 거 같아서 말 않은 겁니다
솔직히 얘기해 봐. 관장인 내가 이유를 알아야지
그럼 까놓고 말하지요. 태권도부에 너무 실망했습니다
뭘?
저번에 고연전 날 회식 때요. 지금 나 쫒아다니는 둘이 연대생 한 명 폭행한 거요
그게 뭐?
고연전 친선 게임 아닌가요. 졌다고, 분풀이 한다고 패다니요. 게다가 데모하다 전경에게 쫒기는 학생이잖아요. 도와주지는 못 할 망정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관장님 선배님은 잘했다고 칭찬하고. 혼낼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어쩌라구? 탈퇴는 자유지만 빠따는 맞아야 해. 그게 전통이야. 나 신입생 때도 그랬어
보세요. 고연전에 지면 연대생 조패는 게 전통. 그거 싫어서 탈퇴하면 빠따 초죽음. 이게 태권도부잖아요. 태권도가 뭐죠. 심신 수양 아닌가요. 정당방위로 어쩔 수 없을 때 방어용이 태권도. 저는 그렇게 배웠어요. 녀석 둘이 여기서 태권도 처음 배워서 모르는 거까지는 이해해도 폭력과 칭찬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탈퇴하려면 빠따 맞아야 해. 전통이라 나도 어쩔 수 없어. 엎드려 뻗쳐
꼭 이래야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저 삼수. 제 친구들 여기 3학년입니다. 저 어린애 아닙니다. 저 틀린 말 안 했습니다. 저는 잘못한 거 없습니다. 태권도부 가입이 자유이듯 탈퇴도 자유. 더 이상 저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애들 붙이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선배님
야, 임마. 거기 서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관장도 나를 잡지 못 한다. 관장은 허울일 뿐, 인상 더러운 복학생일 뿐 태권도 실력 허당. 날렵 다부진 쌈꾼인 나를 혼자서 제어할 순 없었다. 깡패만도 못한 ㅅㄲ들. 헌데 둘이 다시 찾아 오면 어쩌지. 동생들과 치고 받기도 창피하고, 경찰이래 봤자 폭력인 거 마찬가지라 신고하기도 그런 시대. 다행히 그날 이후 녀석 둘은 다시는 나를 쫒아 다니지 않았다
● 낭만은 첫 키스여
첫 미팅 첫 키스. 이건 성대 때 여러번. 이건 치밀한 작전과 고도의 스킬이 필요해. 분위기부터 잡아야. 경양식 집. 벽쪽 구석 자리. 비후까스, 돈까스, 생선까스. 마주앉은 녀에게 주문하라 하고 머리 하나 위 늘어뜨린 붉은 빛 어스름한 갓등 아래. 단 둘이 포도주 곁들여 이야기 꽃. 두어 시간여. 배 부르고 취기 돈다. 이때쯤 잠시 실례 화장실. 머리 매만지고 입 헹굼. 다녀와서 녀 옆자리에 슬쩍 앉는다. 녀 벽 나 통로쪽. 포도주 한 병 더. 오른팔을 어깨에 살포시 얹는다. 이때 무게감 안 느끼게 벽을 짚듯이. 잠시 후 팔 오무리며 녀 몸을 내쪽으로, 내 몸도 녀쪽으로. 오른손은 녀 얼굴을 내 정면으로 각도 틀고. 약한 듯 강한 듯 약한 듯. 거부해도 못 벗어나고 달려올 정도. 너무 세면 겁 먹고 너무 약하면 빠져나간다. 손아귀에 쥔 새처럼 조심스럽되 애지중지. 동시에 입술을 녀 입술에 살포시 얹는다. 민들레 송이처럼 부드럽게. 보석보다도 더 귀하게. 첫 키스는 부드러울수록 날카롭다. 녀는 본능적으로 얼굴과 몸을 뒤로 뺀다. 손으로 얼굴을 밀치기도. 허나 팔에 매인 몸, 손아귀에 담긴 얼굴. 탈출 불가능은 녀에게 현실이자 핑계도 된다. 남자는 언제고 녀를 배려해야. 특히나 첫 키스 아닌가. 녀도 나도
오오, 첫 키스를 얼마나 기다렸는가. 17년. 이때문에 시달린 세월은 또 얼마던가. 이성에 대한 갈망. 첫 몽정이 그 시작이었으니 중2였다. 이후 고3까지 5년.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는 상상. 생명의 영속을 위해 유전자에 콱 콱 박아 놓은 본능의 욕구 둘 중 하나. 어찌할 도리 없이 휘둘릴 뿐인. 제아무리 아래로 힘 뺀들 그때뿐. 공부해야 할 머리는 금방 이성으로 가득찬다. 뭐야. 여자가 뭐야. 여자가 도대체 뭐길래 나를 이리 괴롭혀
고2. 학성동. 군사 도시라 군인 상대로 사시사철 성업인 곳. 가야만 했다. 도대체 왜 날 이리 집요하게 괴롭히는 거야. 실체를 밝혀야 했다. 낮이라 한산. 인도 옆으로 난 골목 입구에 구멍가게. 두꺼비 소주 한 병 사서 안주 없이 꿀꺽꿀꺽 병째 나발. 태 나와 첫 술. 긴장해서 쓴지 단지 짠지 맛 모른다. 물 맛 같기도. 헌데 목넘김 울컥 받친다. 이걸 왜 먹지?금세 몸 후끈. 이게 취한다는 거구나. 감히 골목을 들어설 용기란 거도 생긴다. 간판이 보인다. 여인숙. 기웃하니 눈 마주친 중년 녀 팔 잡아 잡아끈다. 사람 둘 누우면 차는 방. 기다리란다. 얼마후 젊은 녀. 작은누나뻘. 아 더워. 웃옷 훌러덩. 치마, 빤스 훌러덩. 단 몇 초에 신비가 와르륵 무서진다. 오빠, 안 벗어?녀 빤히 보는데 어떻게 벗어. 벗는 둥 마는 둥 엉거주춤. 오빠, 처음이야. 예, 처음이예요.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해줄께. 대신 빨리 끝내야 해. 헌데 작동 불능. 겁 먹어 죽은 놈 심폐소생. 첫 소주 한 병으로 풀려던 긴장이 불안으로 바뀌어 고조. 박살난 신비의 파편은 해면체에 박혀 혈류를 막는다. 평소 제멋대로 불끈이 녀석은 정작 기회를 주니 고치속 번데기 모냥 처량하다. 이렇게 난 대낮에 여자 앞에서 처음 발가벗었고 순정을 강탈 당했다. 정작 해보지도 못 하고서. 키스도 한 번 못 했다. 나중 알았지만 그런 녀들은 몸은 팔아도 입술은 주지 않는다는
성대 입학하자마자 고래부터 잡는다. 그건 녀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기에. 어기적 어기적. 녀석은 왜 또 이럴 땐 더 나대는지. 다 낫는다. 끝 부분 아래쪽 좁쌀들. 어랏, 이게 뭐? 사마귀 치곤 작고 티눈은 아닌 것이 돌출. 손톱으로 쥐어뜯는다. 어랏, 아무리해도 버틴다. 이틀 그러다 포기. 오래 오래 지나 알았다. 절대 없애면 아니 되는 것. 손톱깎이로 싹뚝 안 하기 천만 억만 다행이란 걸. 그만큼 성에 무지했다. 부모도 학교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학교 12년 내내 남녀칠세 부동석이니 남녀분리. 따라서 중고 남학교, 여학교 엄격 구분. 여선생도 가물에 콩. 성에 대해 들은 거라곤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거. 그리고 쌍욕들. 그리고 꼬맹이 때 봉구네집 변소에서 양장집 아가씨 쉬야 응가하는 거. 호기심이 낳은 충격. 희한하게 봉구 아부지는 아래서 위를 볼 수 있게 지었다. 나쁜 뜻 아니고 장마에 똥 퍼내 버리기 쉽게 개울 바닥에 지은 창작품이었다
그랬다는 거. 그만큼 첫 키스라는 건 일생일대 대사건이라는 거. 에베레스트 등정과 같다는 거. 그러니 그에 걸맞게 기다리고 준비하고 실행하고. 그리하여 성대 앞 경양식 집에서 생애 첫 키스. 사랑도 없이 몹쓸 짓이라 비난 말라.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긴긴 세월 참고 기다리고 그러다 훌러덩녀에게 수모 당하고, 시간, 돈, 정성 투자하고. 더 이상 날 보고 어쩌란 말이오. 무슨 나쁜 일, 나쁜 생각 아니라 궁금한 걸 어쩌란 말이오. 더구나 난 호기심 왕, 도전 킹, 체력 짱인데 말이오. 녀도 호기심은 마찬가지일 거 아니오. 녀도 그러하다는 걸 안 건 첫 만남 첫 키스 첫 시도였다오. 옆 앉아도 되냐고 물으니 그러라 하더이다. 팔 어깨 슬쩍 얹어도 감싸도 그냥 있더이다. 완력 아니어도 내쪽으로 당겨지더이다. 입술 닿을 때 뒤로 조금 뺐지만 옆으로 홱 돌리진 않더이다. 다음 수순 다 받아주더이다. 서로를 탐구 학습. 청춘의 권리 행사였다오. 서로가 서로에게. 다들 통하더이다. 다만 대개 첫 키스로 끝냈다는 거
● 낭만은 첫날밤이여
첫날밤은 영화를 봐야 이루어진다. 마지막 상영. 단성사 옆 골목. 경양식 집. 오늘 미팅서 처음 만났다. 포도주 잔 기울이며 영화 이야기. 영업 시간 끝나서 나오니 버스 끊긴다. 밤 12시 통행금지. 서울 종로 한가운데서 밤을 보낼 곳은 여관뿐. 경양식 집 골목 안쪽 깊숙히 여관. 온돌방. 이런저런 이야기. 잘 시간. 이제 자자 하니 그러란다. 벽에 무릎 안고 자기는 괜찮다고. 사나이 혼자 편히 잘 수는 없다. 같이 자자 하니 그럼 선을 넘지 말란다. 약속하란다. 약속. 이불 두 채를 깐다. 거리를 두어서. 아, 이게 아닌데. 그런 약속을 왜 받냐. 왜 했니. 경양식 집에서 키스라도 할 걸. 손도 못 잡아보고 뒤척이다 잠든다. 아침에 깨어 보니 녀 밤새 뜬 눈이었다고
고2. 원주시청 청사를 다시 짓는다고 허물었다. 단층 지하실은 비밀의 뚜껑을 활짝 열었다. 고3 녀. 시립도서관서 공부하는데 짝꿍 친구가 소개해 줬다. 통금 시간. 시청 지하로 숨어든다. 지하래봤자 사림 키에 팔 하나 더한 깊이. 둘이 나란히 벽에 등을 붙인다. 어색함을 떨치려 이런저런 이야기.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슬며시 녀의 손을 잡는다. 쌀쌀한 초가을. 녀의 손은 따뜻하다. 갓 튼 새하얀 솜처럼 부드럽고 손에 쥐여 가녀리다. 고개 드니 밤하늘에 별이 눈으로 쏟아진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었다. 똑같은 별이었다. 긴 시간. 소변 마려워 각자 자리를 잠시 비웠을 뿐 그 느낌에 끌려 다시 손을 잡는다. 별빛이 새벽 빛에 가릴 때까지 온밤이 하얗게 새도록. 키스하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 했다. 내가 사귄 첫 여자. 처음 쥐어본 손. 내가 밤을 함께 보낸 첫 여자는 연상녀였다
고대 1학년. 사랑은 운명이다. 청량리 발 원주 행 열차. 옆 좌석에 녀. 사랑은 타오르는 불이었고, 이별은 그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사랑이 깊으면 이별은 너무 아프다. 운명의 이별. 엉엉 우는 것 외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사랑이 집착이란 걸 그때 알았고, 이별의 아픔이 두려워 사랑을 조심하게 되었다. 내 첫사랑. 이별의 운명. 나중 단편으로 남기련다. 이따위 나부랭이 글에 내 첫사랑, 운명의 사랑을 가벼이 흘릴 순 없다
● 낭만은 현실이여
학점
고대 영문학과 훌륭하다. 딱 내 과다. 낭만 즉슨 문학 아닌가. 실전. 술, 자유, 정의, 독서, 축제, 동아리, 연애. 수업은 이론 보충일 뿐. 학점 기본만 따기로. 목표 3.0 B 이상. 수업은 개강, 종강 때 한 번. 중간에 어쩌다 한 번씩. 거의 안 들어간다. 영문과 학점 따는 비법 있으니 이건 필요한 사람만 알켜줄란다
체력
술 매일 먹어도 태권도로 체력 보강. 중앙도서관 옆 후문 옆 도장에서 땀 흘리고 샤워 하면 몸에 알콜 쏙 빠져나간다. 국민학교 5학년부터 이은 습관. 근육은 탄탄하고 몸은 가볍다
고려대학교 1학년 때 이야기다. 성대에서 첫키스. 이후 이성을 향한 갈망의 봇물은 거침 없이 무논을 채우고 들을 지나 장강에 이르렀다. 굽거나 내닫거나 휘몰아치거나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다. 겁 하나 없이 세상에 당당하지만 여자 앞이면 늘 부끄러운 청춘은 한 여자와 결혼한다. 어깨에 둘을 이고 망망대해를 항해하게 되었다. 한쪽은 가족이라는 보석 상자, 다른 쪽은 책임이라는 멍에
생애 좌우명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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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보면 잡아라.
성공을 만끽하라.
늦빠. 늦었을 때가 빠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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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균이 연보
79년. 성대 야간대학 무역학과 1학년 (청춘의 방황 1차)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또는 사망. 정치 논쟁 싫어서
79년 12월 12일. 전두환 쿠데타
80년. 성대 2학년 1학기 등록금 납부
80년도 대학입시 전면 개편. 본고사 폐지, 대학정원 2배 증원
80년 봄. 신촌 대흥동 숙박 독서실서 대학입시 준비. 자습
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81년. 고대 영문학과 1학년 (청춘의 낭만)
82년. 2월. 군 강제징집 (청춘의 방황 2차)
84년. 7월. 군 제대. 고대총장실 박살 (청춘의 방황 끝)
요즘 영화 서울의 봄 뜨겁다. 당시 나는 극도의 정신적 방황기로 태백 탄광 막장 갔다 왔을 때. 5ㆍ18 민주화 운동 때는 독서실서 대입 준비하다 신문 보고 알았다. 전두환은 고대 1학년 겨울방학 때 나를 잡아다가 군대에 처박는다. 이른바 강제 징집. 다시 지옥행 열차. 군에서 여섯 명 의문사. 철들고 이거 하나만 내 선택 아니었다. 자연스레 연재 다음 회 되시겠다. '그날 나는 청춘의 방황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