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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삼거리에서 Jul 27. 2020

보물 2호 물통 (노 일병)

망군 亡軍


-- 대검으로 통의 주둥이를 따고 멀쩡한 새 식용유를 땅에 콸콸 쏟아 버리고 통을 완전히 비운다. --





손수 제작한 보물 2호 물통으로 물 나르는 노 일병. 





물통은 소대의 보물이다.


식용유 통이다. 안은 물을 담을 수 있게 깨끗하지만 겉은 불에 타서 새카맣. 군에서 지급하는 보급품은 아니다. 소대마다 쫄따구가 알아서 구해야 한다.

최전방의 겨울은 유별나게 춥다. 40여 명 소대 막사 난방으로 페치카를 땐다. 막사에 드럼통을 반토막 낸 커다란 물통이 페치카 위에 앉혀 있다.


부대 한가운데로 개울이 흐른다. 거기서 물통으로 개울물을 길어다 페치카 물통에 채워야 아침, 저녁으로 고참들이 뜨끈한 물로 세수하고 빨래한다. 페치카 물통의 수증기는 내무반의 습도를 조절한다. 부대는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개울은 산에서 흘러내린 청정수다. 야외로 교육이나 훈련 나갈 땐 각자 개울서 허리에 차는 개인용 수통에 물을 담는다. 고참은 쫄따구가 물통에 받아 온 물을 편안히 앉아서 수통에 담고. 그러니 물통은 소대 필수품이다.




ㅡㅡㅡ




식용유 빈 깡통을 팔아먹는지 짜웅해야 주는지 우리 소대는 받아본 적 없다. 대대 취사장에 식용유가 들어온다. 다음 날 생선 튀김 메뉴가 있을 때다. 부식 트럭에서 네 통인가 내린다. 식사할 때 식용유 통의 위치를 눈여겨봐 둔다.

모두가 가장 깊이 잠든 새벽 1시 불침번이 나를 깨운다. 취사장으로 간다. 캄캄하다. 지키는 취사병은 없는지 소리로 살핀다. 소린 없지만 혹시 있을지 모른다. 낮에 봐 둔 식용유통으로 접근. 사냥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어둠 속에서 양손에 하나씩 두 통을 응차 속으로 외치며 힘내어 들고 잠입의 역순으로 취사장을 빠져나온다. 쓰레기장으로 가서 더미에 파묻거나 근처 숲에 숨긴다.


심야 작전 성공.




ㅡㅡㅡ




날이 밝으면 취사장이 발칵 뒤집힌다. 취사병, 간부가 대대 내 모든 소대 막사마다 찾으러 다닌다. 예민하니 며칠 넘긴다.


잠잠하다. 쓰레기장으로 직행. 대검으로 통의 주둥이를 따고 멀쩡한 새 식용유를 땅에 콸콸 쏟아 버리고 통을 완전히 비운다.


통 굽기. 연기가 안 나게 불을 피운다. 통의 바깥쪽을 골고루 태운다. 인쇄, 도색이 타며 그슬린다. 다 태우고 나면 겉이 새카맣다. 속은 반질반질 광채가 난다. 사방을 적당히 우그러뜨린다. 방금 만든 새 거라는 표시가 안 나게. 통 위 양쪽에 구멍을 내고 준비해 간 철사로 구멍에 꿰어 반원형 고리를 만든다. 손잡이 겸 물지게 걸이다.

최종 점검. 들어서 밖을 살핀다. 어느 소대를 가나 똑같이 생긴 찌그러진 까만 물통이다. 안을 본다. 아침 햇살에 빚을 발하며 휘황찬란하다. 취사병이든 간부든 찾고 뒤져도 여느 통들과 구분이 안 된다.

완벽하다. 뿌듯하다. 기분 째진다.


주간 작전 성공.




ㅡㅡㅡ




이거 두 통이면, 던 거 네 통 중 헌 거 두 통을 버리면 도로 네 통. 올겨울은 끄떡없다. 새까만 새 물통을 만들면 한동안 개울에 물 길러 가는 게 신난다.


소총이 전시에 군인의 생명을 지키는 보물 1호라면, 전쟁 아닌 평화의 시기에 물통은 군인의 생명을 유지하는 물을 담아 나르는 생명 통이다.


1982년이다. 






그때는



전투 장비 중 수통이 필수인데 6.25 전쟁 때 썼던 우글쭈글 찌그러진 거 주드만 소대 생명 통인 물통을 왜 안 줬는지. 멀쩡한 식용유 한 통과 빈 식용유 깡통 중 어느 게 싼가?





지금은



기사 보면 수통이 여전히 문제다. 수통마저 그런 거 보면 최전방이나 산꼭대기, 격오지 소대나 분대에 생명 통인 물통은 보급품으로 지급하나 의심스럽다. 혹시 아직이면 시간 더 끌지 말고 식용유 납품 회사에 빈 통 좀 보내라 하자. 빠께스든지 물 담아 나를 거.   




2018.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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