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 부다페스트 중앙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 안에서 우리(그러니까 나와 남편)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클립 영상 몇 개를 다시 봤고, 하리보 젤리를 먹었고, 비엔나에서 지낼 숙소를 알아봤다. 우린 운이 좋았다. 급하게 알아본 숙소는 새하얀 가구들과 커다란 창문을 가진 작고 깨끗한 아파트였고, 정말 마음에 들었다. 저녁마다 테라스에 앉아 식사하는 아파트 주민들의 대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우리는 자주 창문을 열어 놓았다. 가끔은 그들의 느긋한 모습을 흉내 내기도 했다. 부엌엔 앙증맞은 오븐이 있었는데 그걸로 빵과 스테이크를 구워 저녁으로 먹거나 숙소 근처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 와 느긋하게 먹었다. 숙소 앞에 오일장이 열리면 망고를 사다가 창가에 널어놓고 후숙 해서 먹었다. 볕이 잘 들어 망고도 금방 익었다. 숙소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다뉴브 강을 낀 공원이 있었다. 거기엔 엄청나게 큰 그네가 있었는데 그걸 타고 있으면 내가 꼭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주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 초록색 철교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잠에서 깬 모습 그대로 누워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이 곧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포근한 침대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샤워를 하고 트렘을 탔다. 어느 날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하던 교수님은 뜬금없이 영화 한 편을 소개해주셨다. <비포 선라이즈>. 1996년에 개봉한 영화니까, 영화가 만들어진지는 당시로부터도 이미 십여 년이나 지났었다. 백발의 교수님은 오래된 영화 속 셀린과 제시의 사랑 이야기를 눈을 반짝이며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그 뒤로 나는 <비포 선라이즈>를 열 번도 더 보고야 말았다. 영화는 열 번을 봐도 늘 새로웠었다.
우리는 트렘을 타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비엔나를 바라보았다. 영화 속 장소들에 가 볼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이 일렁였다. 그렇게 처음 닿은 장소는 초록색 철교였다. 우리는 철교 난간에 기대 서서 한참 있었다. 철교는 그 자체로는 그다지 멋지지는 않았지만, 감격은 길었다.
3. LP샵 Alt&Neu
처음 Alt&Neu에 갔을 땐 문이 닫혀 있었고 이튿날에 다시 가보니 다행히 열려있었다. 거기엔 수만 장의 LP가 있었다. 가게 어디에서든 가장 잘 보이던 벽에 Kath Bloom의 앨범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샵 직원에게 벽에 걸린 앨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거, 살 수 있어요?'라는 천진난만한 질문을 했고, 그녀로부터 '저건 세상 모든 영화 팬들이 사고 싶어 하는 앨범인 걸요.'라는 답을 들었다. 그녀는 웃으며 벽에서 액자를 떼어 나에게 건넸다. "대신 기념사진을 찍어 줄게요." 우린 거기서 1유로짜리 바흐 연주곡 LP를 샀다. 음악감상실은 공사 중이었지만, 다행히 턴테이블이 카운터 옆에 있어 그걸로 음악을 조금 들었다.
4. 프라터 놀이공원 Plater
영화 속 셀린과 제시가 첫 키스를 한 관람차를 타러 프라터 놀이공원에 갔다. 관람차를 탈 땐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했는데, 줄을 서있는 동안 우리는 얼마의 비용을 내면 관람차 한 칸을 통째로 빌려 디너파티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기다란 테이블, 하얀 식탁보, 웨이터들의 정중한 서브, 고급 코스 요리. 그날 관람차 안에서 디너파티를 하고 있는사람들은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노부부 세 쌍이었다.
우리 순서가 되었고, 이미 만원인 관람차에 들어갔다. 석양 키스는 이미 날아갔고,영화 속의 낭만도 없었다. 관람차 옆에는 높은 데에서 뺑글뺑글 도는 그네가 있었다. 남편은 그걸 타고 싶은 눈치였는데 난 도저히 그걸 탈 용기가 생기지 않아 결국 남편만 탔다. 그냥 나오기 아쉬운 마음에 다트 던지기를 했다. 돈은 날렸지만, 우리에겐 오래도록 꺼내볼 영화 같은 추억이 생겼다.
5. 클라이네스 카페 Kleines Cafe
클라이네스 카페는 이름대로 아주 작았지만, 카페 주인은 큰 사람이었다. 손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편안한 위트, 커피를 내리거나 와인을 글라스에 따를 때의 진중함 등이 그를 크게 보이게 했다.
나는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작은 카페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다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베이지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멋진 할아버지와 짧은 머리의 여자와 긴 머리의 남자. 그들은 각자의 테이블에서 신문을 읽거나 담배를 폈다. 커피를 마시고, 와인을 마셨다. 그땐 꼭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찌르르했다. 그들 틈에서 편안히 커피를 마시며 잠깐 쉬었다.
6. 카페 스펄 Cafe Sperl
셀린과 제시가 서로의 속 마음을 솔직히 내보이는 장소가 바로 카페 스펄이다.
스펄에 가는 길에 우리는 다투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것 때문이었는데... 어쨌든 우리는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주문하고서도 언쟁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종업원은 다투는 우리 앞에 자두 타르트와 사과 슈트루델과 커피를 절도 있게 내려놓았다. 아, 그 디저트가 너무 맛있어서 마음이 풀려버렸다. 우린 종업원에게 셀린과 제시가 앉았던 자리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녀는 약간 뽐내는 표정으로 벽 쪽 가운데 소파 자리를 가리켰다. 감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덮인다. 그 모습이 밉지가 않고 귀엽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조금 수그러든 태도로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아 보라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팁으로 얼마를 주고 카페를 나왔다. 초여름의 볕은 충분히 따사로웠다.
7. 오페라하우스 옆
비엔나 오페라하우스에서는 테라스 석을 싼 값에 당일 판매한다. 운이 좋으면 싼 값에 좋은 자리에서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한 시간쯤 기다려서 표를 샀다.
<삼손과 드릴라>라는 익숙한 제목의 오페라를 보고 나왔다. 서서 보는 거라 다리가 좀 아팠지만 좋은 공연을 봤으니 되었다. 늦은 시간, 공연을 보고 나온 사람들과 비엔나의 밤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로 오페라하우스 앞 광장은 북적였다. 우리는 사람들을 피해 길을 건넜고 어느 동상 앞에 앉아 쉬었다. 그러곤 눈 앞에 펼쳐진 모습에 당혹스러운 반가움을 느꼈다. 그건 영화에서 보던 장면이었다. 우리가 앉아 쉬던 동상은 셀린과 제시가 아침을 보내던 곳이었다. 남편은 그 동상 밑에서 제시가 읊었던 시를 따라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