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시내를 걷다가 선착장이 있어 표를 끊고 배에 올랐다. 난 그 배가 삼십 분 정도 휘리릭 돌고 돌아오는 유람선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배는 오랫동안 앞으로만 나아갔고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렇게 한 시간. 점점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나와는 달리 함께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들뜨기 시작했다. 난 그 표정들을 위안 삼기로 했다. 그래, 어디든 가겠지. 마음을 비우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제비처럼 꼬리가 긴 턱시도를 입고 커피를 나르는 웨이터 할아버지와 그의 뒤를 따르는 바이올리니스트. 풍선을 들고 뛰어다니거나 갈매기에게 과자를 던져주는 아이들.
배가 첫 번째 섬 선착장에 도착했을 땐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도 눈치껏 내리지 않았다. 두 번째 섬 선착장에서야 사람들은 우르르 내렸다. 나도 그들을 따라 내렸다. 작은 선착장을 뒤로하고 사람들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앙증맞은 마을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쯤 지나자 배에서 내렸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들 어딘가로 흡수되어 사라졌고, 광장은 한산해졌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좀 어벙벙했지만, 어쨌든 나는 어느 섬에 도착했고 그 사실만으로 행복해져 버렸다.
광장 근처 가게에서 따뜻한 토마토 수프를 사 먹으며 한국에 있는 남자 친구(남편)에게 물어보고 섬 이름이 뷔위카다라는 걸 알아냈다. 이 섬은 자동차가 없는 섬, 자전거와 마차들만 간간히 지나다니고 나른한 개들과 고양이들이 도로에 벌러덩 누워 햇빛을 쬐는 섬이었다. 파스텔 톤의 웅장한 목조 건물들이 잘 닦인 도로 옆으로 늘어서 있었고, 과연 저기에도 사람이 살까 싶을 만큼 화려한 집에는 'for sale'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저런 집에서 살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며 담장 너머를 힐끔거렸다. 그 안에는 꽤 넓은 정원과 앙증맞은 프라이빗 해변이 있었다. 만약 그 집을 산다면 저 정원과 해변도 내 것이 되겠지.
섬의 낮은 데를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조금 더 높은 데를 걸었다. 거긴 아까 보았던 파스텔 톤의 웅장한 집들보단 작은 집들이 있었다. 세 발 자전거를 타는 할머니도 있었고, 여기저기 걸어둔 빨래도 보였다. 그러니까 거긴 사람 사는 동네였다. 조금 더 올라 섬의 가장 높은 동네로 향했다. 이제 내 눈 앞에 보이는 집은 작고 초라한 것들밖에 없었다.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아까 섬 아래에서 화려한 마차를 끌던 말들과 그들을 씻기는 작은 아저씨, 그 옆에 앉아 쉬는 늙은 어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나에게 여행의 축복을 빌어주셨다.
뷔위카다에서 나와 먼저 섰던 섬 헤이벨리아다로 향했다. 그 섬은 뷔위카다보다 작았고 마을 광장 같은 것도 없었지만, 생활의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나는 선착장 근처에 있는 자전거 가게에 여권을 맡기고 자전거를 빌렸다. 복작거리는 시장을 지나 조금 달리니 너른 잔디밭이, 숲이, 다시 바다가 나왔다. 바다는 해를 넘길 준비를 하며 이제 곧 어두워진다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눈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시간쯤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구경했다. 생선 가게와 채소 가게, 케밥 식당, 베이커리. 1968년부터 운영했다는 베이커리에 들어가 딸기 케이크와 터키쉬 커피를 주문하고 바깥 자리에 잡고 앉았다.
원두 가루가 그득히 가라앉아 있는 커피를 마시며 헤이벨리아다를 열심히 구글링 했다. 내가 건진 건 이곳 헤이벨리아다에는 얼마 전까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과 유대교 회당 건물도 섬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것. 또 그리스 정교회와 신학 대학원도 있었지만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하긴, 터키도 이슬람 국가지. 아, 그리고 섬에 사는 사람들은 3천 명 정도인데, 여름이 되면 비어있던 집들이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섬에서 지낸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것들을 미리 알고 입도했다면 좀 더 깊은 여행이 되었을까? 깊은 여행이 따로 있나. 오늘 여행도 괜찮았잖아? 나는 속으로 자문자답하며 어두워진 거리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