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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자리작가 Sep 10. 2024

과거와 이별을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책]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생각을 표류하다 보면 뭘 생각하려 했는지 잊어버리곤 해요.

처음엔 분명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는데 답을 찾아 표류하다 보면 전 어느새 예상치도 못했던 기억들 앞에 서있어요. 그 기억들을 마주하며 또 생각에 빠지니 생각에서 해어 나오면 결국 뭘 바랐는지도 모를 항해를 하다 눈치 보면서 묻겠죠.


"뭐라고 했더라?"


예전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생각이 많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래서 제목을 보며 사람들에 제게 했던 그 말들이 메아리처럼 겹쳐왔어요. 때론 부모님이, 때론 선배가, 그리고 엊그제 만난 친구에게도 들은 것 같은 말. 그 정도로 사색에 빠져 살았습니다. 생각한 만큼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믿었으니까요.


이런 생각의 원인이 어린 과거와 연관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습니다.

철없는 제가 어른이란 말에 꽂혔던 이유도 어린 시절의 나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과거에 풀지 못했던 것들이 미련으로 남아 자꾸만 헤매는 게 아닐까 하고요.


이유야 뭐 너무 많은 생각에 지쳐버린 제게 기준점이 될 조언이 필요했어요.

아무런 목적 없이 표류하고 있는 제게 방향을 잡을 조언 말이죠.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중립 지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분명한 호감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어느새 ‘모든’ 사람으로 확대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저는 남을 보는 시선이 유연하다고 여겼어요.

다른 사람들이 저와 생각과 신념이 다르더라도 '그 사람은 그럴 수 있지.'라며 의연하게 받아들였죠. 제가 포용력이 높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가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라며 흘러 넘기곤 했죠. 남이 하는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며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한 다른 시선일지도 모른다 여겼죠.


그렇지만 '나'에 대해서 한 말까지도 그렇게 유연히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어떤 문제의 발생원인이 나거나 아니면 관련이 있을 경우 극단적으로 스스로를 자책하죠.

'조금 더 신경 쓸걸.''좀 더 관심을 가질 걸' 등등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며 자책해 버려요. 그렇게 이유가 계속되다 보면 결국 '난 태어나서 민폐만 끼치나 봐.'라며 자괴감에 빠져버리죠. 세상 모든 문제는 내 탓이라면서요.


나에 대한 생각들이 좀 더 유연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탓하진 않았겠죠?



어제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일이 오늘은 즐겁지 않고, 남이 자신을 조금만 칭찬해 줘도 기분이 날아갈 것같이 좋아진다고도 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 보면 일상생활이나 직장 생활은 큰 무리 없이 꾸려 나가고 있고, 수면 등에도 별문제가 없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감정이 당신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네요.”


하기 싫은 일도 거부감 없이 거뜬히 해낼 수 있는 날이 있는가 하면 항상 즐기기만 하던 일이 재미없기만 한 날이 있어요. 글 쓰는 일도 그중 하나였어요. 하나씩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 참 재밌고 보람 있었죠. 흔하지 않은 취미여서 특별한 느낌도 들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즐겁지 않은 거죠. 매일이 즐거울 순 없으니 오늘 하루만큼은 그럴 수 있다고 여겨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아쉬움이 들죠.

'벌써 질리다니 이 일이 내게 이 정도 의미 밖에 안 되는 건가?'

애정하던 취미였기에 더 아쉬웠어요. 더 잘하고 싶었고, 평생 하고픈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문득 글 쓰는 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봤어요. 왜 난 점점 더 즐거워지지 않는 건가?


돌아보니 제 삶에 변화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생겼던 거예요.

글쓰기 외 취미생활도 생겼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놀 모임도 있으니까요. 없던 것들이 생기기도 했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기도 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가치도 변했어요.


무엇보다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게 더 컸어요. 더 잘 쓰고 싶으니 괜히 욕심이 났고, 욕심만큼 못하니 쓰는 게 안 즐거웠어요. 돌이켜보면 당연한 것이었죠. 하던 일을 더 잘하고 싶은 게 당연한데 그러지 않으니 마음이 애탔던 거죠.



모든 상황에서 ‘짜증 난다’는 말부터 하게 되면 부정적 감정이 드는 원인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원인을 모르니 그 감정을 해소할 방법도 사라져 버리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테면 서운한 감정은 포용으로, 질투심은 인정으로 해소할 수 있는데, ‘짜증 난다’는 말은 그저 부정적인 감정을 뭉뚱그려 놓은 것에 불과해서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평소에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짜증 난다는 것이에요.

특히 화를 낼 줄 몰라요. 화가 나는데 이상하게 이게 표출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화가 나면 자주 짜증을 내요. 제가 무슨 일로 화가 나는지, 뭐가 불만인지 말하지 못하고 그냥 짜증 내면서 일을 하는 거죠.


감정이 솔직하지 못하니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할 때마다 거짓말하는 기분이에요. 숨기고 싶은 건 아닌데, 저도 제 감정을 짜증 난다며 퉁 쳐버리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호해져 버려요.


저는 그래서 감정표를 들고 다녀요.

짜증이 난다거나 어떤 감정의 변화가 생기면 감정표를 보면서 지금 내가 가진 감정이 정확이 그 이름을 찾아요. 이름을 찾다 보면 제가 어떤 이유에서 감정이 상한지 이유가 명확해져서 좋아요. 짜증은 그 이유가 너무 많거든요.


이젠 짜증 난다는 말로 감정들을 뭉그러뜨리지 않으려고요.



떠나가 버린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그가 실제로 살아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그러므로 떠나간 그에 대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가족도 한 때 아빠의 죽음을 금기시하던 때가 있습니다.

장례 후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다 대성통곡하는 엄마의 모습에 자연스레 아빠 이야기를 안 하게 되었죠.

돌아가신 아빠를 기억을 하는 일보다 홀로 남은 엄마에 대한 걱정이 더 컸죠.

시간이 흐른 지금은 가끔 아빠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너무 어릴 때 기억이라 주로 엄마 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편이지만 이젠 웃으면서 추억하죠.


저도 저자의 말처럼 떠나간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렇듯 슬픔을 누릴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망자에 대한 이야기 역시 슬퍼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성인이 되면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책임입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용서되었던 것들에 책임이 따르며 대가를 치르게 되죠. 삶이라는 무거운 책임 속에서 자유로웠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채 과거에만 집착한다면 그건 도피겠지요.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어른이 되길 바라며 인용문으로 마무리해봅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옛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아들이는 과정이다. 친숙했던 것들과 이별하고 소중했던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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