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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도그린 Jul 02. 2021

행운의 소나기



태양은 자신마저 태워버릴 듯이 에너지를 뽑아내고 있었다. 선풍기를 튼 것이 무색하리만치 뜨뜻미지근한 공기를 만들어내며 연신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이렇게 방안에 있다 가는 뱃속까지 데워지겠는걸. 이미 별 이유없이 미간이 찌푸려진 걸로 보아 오늘 하루 방안에 있으면 얼마 안 남은 참을성도 사그라질 것 같은 확신이 들던 차였다.



바깥의 풍경은 이미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듯한 햇빛이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기미로 세상 모든 것을 녹여내고 있었다.



며칠 전, 여름이면 자주 쓰고 다니던 챙이 긴 모자를 실수로 부러뜨리면서 이 뜨거운 햇빛을 가려줄 쓸 만한 물건이 없었다. 급한대로 비올때도 잘 쓰지 않는 (분명 어딘가에서 기념품 목적으로 대량생산 후 뿌린 우산임에 틀림없다)




어딘가 삐걱거리는, 한쪽 우산대가 벌써 제 기능을 못해 한 면의 모양이 찌그러진 남색우산을 양산처럼 쓰고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이걸 쓰고 나가면 하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초등학생 무리가 쫒아와서 이 사람 뭐야 하고 놀릴 것만 같다. 좀 창피하긴 하지만 뭐 동네 앞이니까.





10분을 걸어 자주 가는 동네 카페에 들어갔다. 날이 후덥지근하니 차가운 음료를 시킬까 살짝 흔 들렸지만 카페 아니면 커피의 맛과 향과 분위기 이 3종세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없는 걸 알기에 유혹을 물리치고 오늘도 따뜻한 커피를 시킨다.



겨우 한 고비 넘겼나 싶었는데 메뉴 판이라는 산이 하나 더 남았네. 이 앞에서는 아까보다 더 망설이게 된다. 이번에는 카푸치노를 주문해본다.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을 보니 만두 찜쪄먹을 날씨 때문인지 나 빼고 전부 컵의 절반이 얼음으로 가득 채워진 음료들이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나 좀 이상한 손님일 수도 있겠어. 그러고보니 이상하다는 말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공기속으로 흩어지지 않고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만 속살로 파고든다. 아마 남과 같지 않아서겠지.



눈 조차 제대로 뜨기 힘든 햇빛이 지면 위 로 지글지글 타오르거나 말거나 뜨거운 커피가 먹고 싶고 찐뜩찐뜩한 선크림 대신 찌그러진 우산을 쓰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





자리에 앉아 시나몬 가루가 잔뜩 뿌려진 카푸치노를 한 모금 훅 들이켰다. 뜨거운 목구멍을 거쳐 뱃속까지 닿아 몸을 뜨끈하게 해주니 조금전까지 잔뜩 이골이 났던 표정이 살짝 풀린다.



문 만큼 긴 미닫이 창을 오른쪽 옆에 두고 갓 만든 커피의 첫 모금의 여운을 더 길게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후두둑 후두둑. 우박처럼 굵은 빗줄기가 땅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매섭게 때리기 시작했다. 카페 앞 도로 위를 지나가는 차들을 단숨에 집어삼킬듯이.



쾅 쾅 쾅. 하늘이 무너져 내릴듯이 비가 쏟아지는 틈을 타 이번에는 번개까지 내리친다. 대지를 뜨겁게 달궜던 열기 가득한 햇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구름군단이 몰려와 하늘과 땅을 하나로 집어삼켰다.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듯, 대지 위에 단 한 톨의 더위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휩쓸고 있는 비를 보니 반가웠다. 소나기가 멀고 온 시원한 공기에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렸다.





예고없이 찾아온 소낙비에 이제 막 카페를 나가려던 사람들이 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굴리는 게 보였다. 조금 전까지 만해도 시원하게 보였던, 옆 테이블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에 송글송글 맺힌 이슬이 갑자기 시린 이처럼 차갑게 느껴진다.



30분전까지만 해도 화창한 날에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이상한 여자였는데, 굉음을 내뿜으며 무자비하게 퍼붓는 소나기 아래에서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순식간에 미래를 예견한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쨌든 나 대신 더위를 물리쳐줄 누군가가 왔다는 소식은 반가운 것이었다. 한 시간동안 테이블 위에 할 일들을 쌓아놓고 멍하니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 위로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늘 내리는 비는 나처럼 그동안 쌓인게 많았나 보다. 나 대신 세상을 향해 소리 내어 울어주었 으니까. 때때로 이 세상이 너무 커 나의 존재가 터무니없이 비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뭘 하든 내가 내는 소리는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겠지 같은 생각.





카페에는 나 말고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가 반가운 손님들이 또 있었나보다. 한 여성손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비가 내리는 순간을 동영상으로 남겼고, 친구와 한참 수다를 떨던 대학생 둘은 대화를 멈추고 나란히 창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떤 손님은 나보다 더 비를 기다렸는지 아예 자리를 야외 테이블로 옮겨 내리는 비 한다발에 커피 한 모금을 번갈아 마시며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문득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가 언제 그칠지 모르겠지만.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과 날씨에 지쳐있을 무렵 갑작스럽게 내린 소나기를 보니 그 모든 시간을 견뎌야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한 날들을 끝까지 견디다 보면 그간의 노력을 싹 씻어줄 소나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다음 번 소나기를 만나기 전까지 난 또 울고 웃는 날들을 버텨내야겠지. 그래도 이제 좀 알거 같다. 버티다 보면 나를 위한 소나기 내리는 날이 올거라는 것을. 다음 소나기때는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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