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이용권
'21,700원'
100원짜리 단위까지 측정된 이 금액을 보고, 눈치 빠르신 분들은 아셨을 겁니다. 택시비입니다. 제가 재직 중인 회사 현관에서 경기도의 자취방 골목까지, 카카오 택시로 찍었을 때 책정되는 금액입니다.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서울 퇴근길에 택시를 타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탑니다... 저는 한달에 4번은 21,700원 주고 택시를 탑니다. 지하철 교통비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비싸지만, 괜찮습니다.배달음식 몇 번 안 먹으면 됩니다ㅎㅎ..
택시를 타고 퇴근하면요, 제 기분이 많이 편안해집니다. 한 번은 야근하고 심신이 힘들어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데, 그렇게 좋더라구요.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서울 핫플에 위치한 회사를 지나갈 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긴장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쳐다볼 수 있습니다.
평소엔 땅만 쳐다보며, 지나는 사람의 눈도, 얼굴도 보지 못하는데, 유일하게 택시에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관음증있냐구요? 그냥 순수하게 쳐다보는 겁니다.
'저 분은 옷을 되게 하늘하늘하게 입으셨다. 오늘 약속있으신가?'
'옷을 저렇게 매치하고도 소화가 가능하시네, 멋지다'
'누가 봐도 잘생기셨다, 완전 배우상이신데. 부럽다'
'정말 사이 좋아보이시네. 보기 좋다!'
등등... 그냥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사람 구경을 열심히 하다가 핫플을 벗어날 때 쯤이면, 대교를 지나기 위해 들어선 차들로 막히기 시작합니다.
붉은 눈을 달고 있는 차 뒤통수를 보고 있으면 답답해 하시겠지만 전 그마저도 좋습니다. 바깥 구경하는 게 좋거든요.
아래로 보이는 한강과 가슴이 뚫리는 듯한 뻥 뚫린 하늘 사이로 보이는 반짝 거리는 건물들과 아파트들,
커다란 제품 광고판
느릿느릿 가던 택시가 속도를 낼 때 쯤엔 그 속도감에 또 기분이 좋습니다. 답답한 마음이 시원해지고, 집에 도착할 때 쯤엔 '집에 드디어 왔다'는 안도감이 느껴집니다. 평소엔 좋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을까봐 걱정하거나 혹은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로 직면한 채 들으며 지나가야하지만, 양 옆으로 코팅된 택시 뒷자리 창문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그 어느 때 보다 편안합니다. 서울 택시는 좌석도 더 편하더라구요
한 번은 코팅된 택시 창문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내 마음이 편하다는 게 참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왜 걸으면서는 편하게 사람들과 주변을 바라보지 못하는 걸까?' 라면서요.
겉으로 티는 안 내도 멘탈이 강하지 않은 편인 저는 퇴근길에 사람 붐비고, 시끄럽게 느껴지는 지하철이 매일의 고비입니다. 그래서 약도 먹고 있지만, 그렇게 효과가 크진 않았습니다.
어쩌다 해본 퇴근길 택시 드라이브, 이젠 한 달에 몇 번 하는 취미가 되었습니다.
(저 혼자선 택시 드라이브 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엄마에게 '한 번씩 서울 드라이브하고 좋잖아' 하니 귀여웠는지 크게 웃으시더라구요)
직접 제가 차를 몰고 다닌다면, 느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에겐 택시 드라이브가 21,700원 짜리 자유 이용권, 정말 자유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