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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코니 Mar 13. 2022

잠들기 전에 읽는 백일야화(百日夜話)

다섯 번째 밤- 그림자 사서(4)



“그렇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장관과 비서가 그림자 쪽으로 눈과 귀를 모았다.     


“서가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을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대신 이용객이 찾는 책이나 읽고 싶은 주제를 적어 신청함에 넣어주면 책을 찾아드리겠습니다. 물론 서가 정리 분류 작업도 책임지겠습니다. 저는 이용객에게 맞춤한 책을 소개하고 권해드리는 일은 하고 싶습니다. 원래 제 직업이 독자에게 읽을만한 책을 제공하는 일이었거든요.” 


이렇게 해서 로날드는 출판사 사장에서 장서가로, 장서가에서 국립 도서관 사서로 변신했다.

약속대로 로날드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 직원들은 처음에 로날드가 수줍음 많고 사교적이지 못해 오직 독서와 공부에만 매달리는 샌님 연구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곧 로날드가 검은 그림자 실루엣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놀라움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다들 괜한 헛소문이라도 퍼트렸다가 유령처럼 정체 모를 존재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조심조심했다. 


로날드는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말들이 귀에 들어와도 못 들은 척했다. 조용히 책장 사이를 오가며 눈에 띄지 않게 일했다. 수장고에 들어서는 순간 느꼈던 감동 때문이었다. 켜켜이 쌓인 책은 평생 읽어도 다 못 읽고 죽을 만큼 방대한 양이었다. 


'남들이 뭐라든 책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다 괜찮다.'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솜씨는 도서관 직원 누구도 로날드를 앞서지 못했다. 가치 있는 양서와 희귀한 고서를 골라내는 안목도 탁월했다. 


시간이 흐르고 뒤죽박죽이던 수장고에 차츰 질서가 잡혀갔다. 이제 도서관 직원들은 로날드를 달갑게 여겼다.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림자 사서’라는 별명도 붙였다. 로날드는 자신이 그림자 사서라고 불린다는 걸 알아챈 후에도 변함없는 고요 속에서 일했다. 멀쩡한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불리는 것에 얼핏 서글픈 생각도 스쳤지만 그때뿐이었다. 외롭고 슬픈 마음이 들 때마다 더더욱 책에 파묻혀 연구에 몰두했다. 처음부터 로날드가 아는 해결책이란 그 방법뿐이었다. 

로날드는 아무도 없는 열람실에서 석양이 빚겨드는 책장 사이를 거닐 때 평화를 느꼈다. 양 옆으로 꽂힌 책을 모조리 읽었다는 자부심과 안도감이 그림자로 변한 사서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서가에서 책을 찾는 이용자 중 처음으로 로날드와 마주친 이들은 인기척이나 발걸음 소리 없이 다니는 그림자 모습에 흠칫 놀랐다. 다행히 그림자 사서에 대한 설명을 미리 들어두었던 이용자들은 성숙하고 배려심 있는 태도로 로날드를 대했다. 그 태도라는 것이 물론 못 본 척 지나치는 행동이 다였지만 말이다. 모두들 국립 도서관을 이용하는 지식인답게 점잖은 말투로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겉모습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겨우 외모로 판단해 대한다면 스스로의 인격과 교양 수준을 드러내는 수치일 뿐이지요. 우린 사서 업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의 곁을 조용히 스쳐 지나간답니다.”


그럴듯한 말이었으나 당연히 핑계일 뿐이었다. 다들 진짜 속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인사를 건네도 대답도 없고 검은 얼굴에 표정도 읽을 수 없는 그림자와 무슨 말을 나눌 수 있겠어.’


대신 자기가 찾는 책의 목록을 로날드 책상에 메모로 남겼다. 그러면 정확히 한 시간 후, 어김없이 신청한 책이 대출대 위에 올랐다. 혹은 어떤 주제에 대한 자료를 요청하는 쪽지를 남기면 역시 다음 날 아침, 대출대에 주제에 관련된 책과 문서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대출자를 기다렸다. 도서관 이용자와 직원들은 그림자 사서의 이런 빈틈없는 일 처리에 만족할 뿐 그 이상의 교류는 기대하지 않았다. 


로날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저 업무에서만 존재감을 느끼는 자리로 굳어져 갔다. 이대로 서가 깊숙한 그늘에서 늙어갈 처지였다. 

이런 로날드의 처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행복한 사람일까, 안타까운 운명일까. 

로날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글쓴이조차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적어도 로날드 자신은 스스로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낀다는 점이었다. 스스로 만족한 삶이라면 글쓴이 건 독자 건 더 이상 따지고 들 일은 아닐 테다. 하지만 그림자 사서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로날드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손님을 통해 읽어본 적 없는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쳐보게 된다.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그림자 사서를 찾아온 강의 여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림자 사서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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