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오전 열 시 반을 기준으로 상행과 하행을 바꾼다. 이른 아침에는 언덕 위의 주민들이 도심의 일터로 갈 수 있도록 하행 운행을 했다가, 오전 열 시 이후에는 주거지인 언덕 위쪽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A는 물론, B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 말고도 A가 알지 못한 것은 또 있다. B는 어제 오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미드레벨 꼭대기까지 가볍게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한 조각의 진정”이라는 카페의 간판을 발견하고 아이처럼 기뻐했었다는 것. “한 조각의 진정”은 여자의 자전적 소설의 제목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 카페의 벽면에 B의 애절한 사랑 고백을 적어 두었다는 것. 이 모든 것을 A는 알지 못했다.
이제껏 안수호의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던 진태우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 전화기를 통해 거의 울먹이는 듯한 진태우의 목소리를 듣고, 안수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B를 찾아 내. 전화 연결은 잘 안 될 거야. 그리고 오늘 저녁 대한항공 스케쥴은 내가 알려 줄 테니까 B랑 같이 공항으로 가야 돼. 뭔가 오해가 있어! 빨리 움직여, 빨리!”
진태우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봤지만 B를 만난 건 워낙에 잡혀 있던 약속 시간에 거의 임박해서였다. 여자의 소식을 듣자 B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새치기로 택시를 잡아타고 홍콩 공항으로 달렸다. 잘하면 탑승구로 들어가기 전에 A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도대체 A의 마음을 알 수 없었던 B는 입 밖으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쪼그라드는 듯 아프기만 했다. 왜? 왜, 나를 버리고 가는 걸까?
아무리 애를 태운들 공항에 닿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미칠 듯이 초조하기만 하던 B가 마음의 냉정을 되찾으려 애쓰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젯밤 때문일까요? 나는 있는 그대로 내 사랑을 표현했을 뿐인데..... 나는 그이에 비해 너무 저속한 인간일지도 몰라요. 확실히 그렇죠. 하지만 설마, 나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떠날 만큼 우리의 세월이 아무것도 아니었을까요?“
딱히 진태우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은 알겠지만 진태우는 뭐라고 한 마디라도 대답을 하고 싶었다.
“빨리 만나서 물어보죠.”
너무 건조한 대답이었지만 진태우의 진정이었다.
여자는 공항 로비에서 잠시 시간을 끌었다. 멍한 정신으로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발이 땅에 닿아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B가 눈앞에 나타나서 상처난 가슴이 녹아내릴 만큼 힘차게 안아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오해이거나 악몽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래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탑승구로 들어가야 할 시간, A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역시 그랬다.
미친 듯이 공항을 헤맨 끝에, B는 막 탑승구로 들어가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손은 닿지 않았지만 부른다면 들릴 수 있는 거리였다.
실은 A도 B를 보았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천천히 티켓 검사대를 지나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문은 이내 닫혔다가 다시 열리기를 반복했고 그 문 바깥에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여자를 부르는 목소리는 없었다.
“불러요! 빨리 부르라고요.”
진태우는 애가 달아 소리쳤다.
그러나 웬일인지 B는 A를 부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신음 소리를 내는 것도 들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B는 A를 부르지 않았고 이제 문 건너편으로 A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진태우와 B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내내 한마디도 않는 B의 기색을 살피고, 수십 번이나 망설이다가 진태우는 드디어 물었다.
“그때 왜 부르지 않았어요?”
B는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요히 대답했다.
“부를 수가 없었으니까요.”
“도대체 왜요?”
“호칭이 없거든요.”
“예에?”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여자는 ‘최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게 되었을 때 B는 더 이상 여자를 ‘최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당신’ 이외의 호칭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밀실 속에서 늘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 사이에 생기자, 남자는 여자를 부를 수가 없었다. ‘최 선생님’이라 할 수도 없었고, B의 일기에서 지칭하듯 ‘다이안’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 그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눈앞에서 여자를 보내야만 했던 이유가.
비행기는 이른 새벽에 한국에 닿았다. 공항을 빠져나오며 진태우가 물었다.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밀실로 가 봐야죠..... 하지만 거기에 아직 그녀가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B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황급히 사라졌고, 공항에는 진태우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진태우는 자기의 역할이 끝난 건지, 아직 남은 건지 판단할 수 없어 또다시 안수호에게 전화를 했다.
“형.......저 방금 돌아왔는데요.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죠?”
가 봤죠. 그 밀실에.......
딸이 있는 미국에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돌아오겠죠. 아마 돌아올 겁니다.......
그런데 그게 뭐 의미가 있나요?
술이 없네...
제길... 나 같은 놈은 이런 인생이 맞지...
내 걱정하는 거예요? XX... 이런다고 안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