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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양이 Oct 11. 2024

13. 시끌벅적 금주 여행 (1)

1. 이번에는 단체여행이었다. 

  그동안 몇 명의 주정뱅이들이 술과 완전히 담쌓는 여행을 의뢰해 왔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그들을 다 모아서 금주 여행 프로그램을 마련하게 된 것이었다. 인터넷에 공고를 올리니 꽤 비싼 경비에도 불구하고 신청자가 일곱 명이나 되었다.    

  

여행 매니저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동안 이런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 술 따위 넌더리가 나도록 중증 알코올 중독자 요양소로 봉사 여행을 가야 한다 

 - 술꾼은 너무 좋아도 너무 나빠도 술 생각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니 가장 어중간한 곳으로 가야 한다. 

 - 술이 더 이상 술로 보이지 않도록 화학과 수학으로 공부한다. 강도 높은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어려운 시험을 치른다.   

   

그러다가 합의에 이르게 된 이번 여행의 필수 요소는 이런 것이었다.     

  - 술 생각이 저절로 간절해지는 풍광. 물소리가 들리고 산들바람이 불어야 함. 혹은 비 오는 처마 밑

  - 술 없이 먹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음식 제공, 싱싱한 미나리와 해물, 육즙이 살아있는 고기 튀김 등

  - 인생의 회한을 맨 정신에 털어놓는 프로그램

  - 규정을 어겼을 때를 위한, 혹독한 벌금 규정     


강도 높은 자극을 견뎌내야만 진정 금주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금주’라는 미션 앞에 어지간히 비장했던 참가자들은 보증금을 낸 뒤, 깜짝 놀랄 수준의 벌금 규정에 마저 서명을 하고 말았다. 여행매니저로는 알코올 중독 상담사 자격증이 있는 안수호와 힐링빵 전문 구아정이 배정되었다..      


2. 여행을 떠나는 날

  참가자들이 하나 둘 등장하자 사무실 안에 술 냄새가 가득했다. 아마도 모두들 금주여행 전야에 밤새 죽기 직전까지 퍼마시다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거기까지 온 듯했다. 참가자는 20대부터 50대까지로, 남자가 한 명 많았다.

  떠나기 전, 개인 돈을 다 압수하고, 실례인 줄은 알지만 짐 검사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30대 여자 참가자의 짐 속에서 화장품 용기에 담아 온 고량주가 발각되었다. 봐주기는 없었다. ‘음주 미수’ 규정에 의하여 보증금에서 15만 원을 지불하고 첫 번째 범칙자로 이름을 올렸다.      

     

  참가자들을 실은 미니버스가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초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생사를 함께한 전우회 같았다. ‘술’이라는 공감대가 워낙에 탄탄한 덕이었다. 술에 대한 취향, 단골 술집, 주량, 주사 무용담까지, 자랑과 참회와 허풍이 난무했다. 그러는 와중에 몇몇 사람들은 이미 금주의 결심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결혼을 앞둔 20대 아가씨와 간경화증 진단을 받은 40대 남자만이 결코 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이를 앙다물었다.     


  목적지를 한 시간 남기고 버스 안에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고주망태 노숙자들의 현실, 술로 인해 범죄에 말려든 사람들의 증언, 술 때문에 망가진 뇌와 내장기관 등이 화면에 뜨자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영상의 내용은 꼭 ‘자기 들으라고 하는 말’ 같은 것이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면서 전혀 고맙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러 현실을 외면하려는 등받이를 눕혀 잠이 들었다.


  목적지인 대종 시까지 앞으로 20Km. 안수호는 구아정의 기색을 살폈다. 대각선 방향으로 앞쪽에 혼자 앉은 구아정은 태블릿 위에 뭔가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준비사항을 점검하고 있을까? 아니면 혹시 일기나 편지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일까?... 

  사실 안수호는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아니, 행사의 장소가 대종 시로 정해진 이후로 계속해서, 구아정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구아정이 태블릿을 끄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안수호도 덩달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래 아정아... 우리는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구나. 

아마도 너의 장면 속에 나는 등장하지 않거나 아주 희미한 엑스트라겠지. 

하지만 내 기억의 장면 속에는 오직 너 한 사람뿐이란다.. 

      


3.  10년 전 

  대학생 구아정이 대종 시의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린다. 누군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역시 대학생이던 안수호다. 

  “어? 선배, 나 마중 나온 거예요?”

  “어, 잘 찾아왔네.”

  “당연하지. 배고파. 여기 빵집 없어요? 우리 숙소로 빨리 가야 되나?”     


  두 사람은 터미널 근처를 뒤져 빵집을 찾았고 달달하고 커다란 빵을 하나 사서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아니, 사실 빵을 먹는 손은 구아정의 것이고, 안수호는 계속 빵을 적당한 크기로 떼어놓고 있다. 빵을 먹는 아정은 유독 명랑하게 반짝인다. 그리고 그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둘은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기억 속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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