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기 동토의 나라에서 축구가 불가능한 이유
카자흐스탄. 이 나라는 축구팬들에게는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이상한 나라라는 느낌을 준다.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권에 속해 있지만, 축구적 시각에서는 UEFA(유럽축구연맹)에 속한 국가다. 독립 직후만 하더라도 한국과 같은 AFC(아시아 축구연맹) 소속이었다. 그러나 2002 FIFA 한·일 월드컵 아시아 예선 이후 모종의 이유로 UEFA로 넘어갔다.
구 소련 출신 국가답게 아시아에서는 월드컵 최종 예선 정도는 해낼 수 있는 나름의 우등생으로 통했으나, 축구 열강의 용광로인 유럽에서 그들의 위치는 끝자락에 가깝다. 뱀의 머리보다는 용의 꼬리가 낫다고 여겼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그들은 힘겨운 경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다.
유럽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이 나라를 먼저 거론하는 이유는, 유럽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스톱 오버 기착지였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플래그 캐리어 에어 아스타나의 허브인 아스타나 공항은 항공 이동 시간과 지리적 기준으로 한국과 유럽의 거의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장거리 항공 이동에 대한 여독을 나름 상쇄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항공권 가격이 제법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어 주저 없이 선택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과거 러시아를 비롯해 구소련을 구성했던 연방국들은 유럽형 춘추제가 아닌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춘추제를 시행했다. 지금이야 유럽형 춘추제로 전환했는데, 사실 이마저도 말이 많았다. 바로 악독하기로 유명한 동토(凍土)의 추위 때문에 유럽형 춘추제를 시행하는 건 무리라는 의견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논쟁이 심했다는 건, 이 추위가 러시아 리그의 운영상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방증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비롯해 서유럽 국가의 윈터 브레이크는 대개 3주에서 한 달가량인 반면, 러시아의 경우는 두 달 혹은 석 달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도 마찬가지 여건에서 리그를 진행하고 있다. 해서 궁금했다. 언젠가 전력 분석 차 모스크바를 방문한 조세 무리뉴 감독이 “아, 춥다. 정말 춥다”라고 푸념을 늘어놓은 게 축구팬 사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 추위가 도대체 어느 정도라 그러나 싶어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다. 때마침 경유지 아스타나를 찾았던 1월 한낮 온도 영하 15도라는 혹한이 예보됐다. 심지어 저녁이 되면 영하 20도, 혹은 그 이하로 내려간다는 서슬 퍼런 예보도 뒤따랐다.
쓸데없는 사서 고생일 수 있으나, ‘혹한 체험’을 위한 모든 여건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국 겨울 역시 만만찮은 데다, 군 시절 지금도 치가 떨리는 혹한기의 경험을 가진 예비역이라는 자신감도 무모한 도전을 기꺼이 나서는 데 한몫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춥다. 아, 정말 춥다. 비단 선수뿐만 아니라 경기장을 찾는 축구팬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들의 윈터 브레이크는 최대한 길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카자흐스탄 최고 시설을 자랑한다는 아스타나 아레나를 방문했을 때 겪은 에피소드가 그 생각을 더욱 굳게 했다.
아스타나 아레나는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의 메인 스타디움이자, 그 시절이 매우 훌륭해 카자흐스탄축구협회(KFF)가 전 유럽을 순회하면서 치러질 유로 2020 경기장 유치 신청까지 했다는 그 경기장이다. 물론 최종 선택을 받진 못했지만 카자흐스탄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기장인지를 알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외관이 마치 독일의 대표 스타디움인 알리안츠 아레나를 연상케 할 정도로 휘황찬란하기로 유명하다. 야간에는 LED를 활용해 환상적인 외관 조명을 꾸미는 스타디움이라 꼭 방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수백 미터를 떨어져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만 했다. 혹 화이트 아웃이라는 기상 현상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남극이나 북극에 가면 온통 눈이 쌓인 탓에 땅과 하늘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현상이다. 다소 과장 섞인 비유이긴 해도, 어쩌면 그 화이트 아웃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 눈이 가득했다. 심지어 사람들이 출입하는 인도의 경우에는 몇몇 길이 통제되는 상태였는데, 아스타나 아레나에 가는 길이 바로 그랬다.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키릴 문자가 새겨진 표지판은 누가 봐도 출입 통제 지역임을 알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싶어 주변을 계속 서성거려봤지만, 없었다.
먼 카자흐스탄까지 와서 경기장을 멀리서 바라봐야 하는 건 조금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출입 통제 경고를 무시하고 그 길에 한번 들어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열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결코 이유 없는 경고판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생존 본능이랄까? 금세 무릎까지 박히는 눈밭, 그곳을 수백 미터를 걸어 아스타나 아레나까지 갔다가는 조난을 당하기 딱 좋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솔직히 인도로 되돌아 나오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겨우 한숨을 돌리니, 지나가다 그 모습을 지켜본 동네 아주머니께서 시끄럽게 몇 마디를 하시곤 발걸음을 옮기신다. 앞에서 말한 경고판처럼 카자흐스탄어인지 러시아어인지 분간도 되지 않아도, 아마도, 아니 분명히 “미친 게 아니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이 경기장의 주인인 아스타나는 3월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방문했을 시점을 기준으로 치른 마지막 경기가 12월 초중순이었으니 거의 서너 달을 개점휴업한 상태로 지낸 것이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서유럽형 추춘제에 억지로 발맞추려고 서너 달을 놀고먹는 것이다.
그래도 멀리서라도 명물이라는 아스타나 아레나의 야간 LED쇼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위안이었다. 소문처럼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를 떠올리게 할 만한 멋진 LED 쇼였다. 물론 그 감상도 살을 에는 영하 20도의 추위에 금방 포기했지만 말이다. 폭설에도 꿋꿋하게 빛을 발하는 아스타나 아레나의 LED쇼에 경의를 표하며 ‘진짜 유럽’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