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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Oct 27. 2019

우리들에게 울부짖는 녀석들이 수치스럽다

‘예보아 하우스’

프랑크푸르트 한 주택가에 자리한 예보아 하우스 @풋볼 보헤미안

행여 ‘붐쿤차’ 투어만하고 프랑크푸르트를 떠날 생각이라면, 잠깐 그 발걸음을 멈추길 권한다. 정말 약간만 시간만 내면 된다. 그곳에서는 인종 차별에 항거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선수의 일대기, 그리고 그 선수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팬들의 훌륭한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니더라드(Frankfurt Niederrad)역으로 향하자.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서 S반을 타고 시내 방향으로 두 코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는 불과 한 코스를 달려 도착할 수 있다.


현장에 도착하면 “이게 뭐야”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주변은 그저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을 위한 한적한 주택가이여서다. 하지만 한 채의 아파트에 유독 시선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파트가 이 동네를 특별하게 만든다. 일명 ‘예보아 하우스’라 불리는 건물이다.

프랑크푸르트 니더라드역 승강장에서 볼 수 있는 예보아 하우스 @풋볼 보헤미안

사실 이 예보아 하우스는 프랑크푸르트를 찾는 외지인들, 특히 낮에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한 이들은 반드시 볼 수밖에 없는 건물이다. 앞서 언급했듯 공항과 시내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니더라드 역과도 지척이라 해도 될 만치 가까워 근방을 지나칠 때 창문 밖을 바라보면 반드시 접할 수밖에 없다.


흰색 바탕에 한 흑인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 얼굴에는 Wir schämen uns für alle, die gegen uns schreien라는 독어 문구가 휘갈겨 쓰여 있다. 이 문구에는 “우리에게 울부짖는 녀석들이 수치스럽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보아는 차범근과 더불어 프랑크푸르트의 레전드로 통한다. @풋볼 보헤미안


누군가를 강렬히 원망하는 듯한 이 메시지에는 사연이 있다. 건물명에서 알 수 있듯, 예보아 하우스에 등장한 인물의 이름은 앤서니 예보아다. 차범근과 함께 빌리 브란트 역 기둥에 새겨진 선수다. 아인트라흐트의 유니폼을 입고 아프리카 최초의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등극하고, 내친김에 2연패까지 달성하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하며 팬들에게 뜨거운 찬사를 받았던 선수였다. 그런 예보아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예보아는 처음부터 박수받는 선수였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꽤나 주목을 받긴 했다. 문제는 그게 실력이 아닌 피부색으로 인한 주목도였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유색인종이 뛰어난 활약상으로 찬사 받은 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60년대 에우제비우가 벤피카를 발판으로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 선 사례가 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네덜란드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 루드 굴리트와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당대의 슈퍼스타로 통했다. 홀연히 독일에 날아가 세계 최고 선수가 된 차범근도 빼놓을 수 없다. 축구는 금발 벽안의 유럽 백인 혹은 열정적인 남미 라티노들의 게임처럼 여겨졌던 그 시절, 이들은 유색 인종 선수들도 얼마든지 최고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유럽과 남미 출신이 아닌 선수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못한다’라는 선입견이 크게 작용했다. 심지어 인종 차별적 풍토마저 깔려 있어 피부색마저 공격당하기 딱 좋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심성이 꼬이고 짓궂은 이들은 일단 실력을 떠나 피부색이 다른 선수가 보이면 공격했다.

예보아 하우스에 새겨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문양 @풋볼 보헤미안

예보아가 그런 처지였다. 차범근이 그러했듯, 예보아는 가나 리그를 평정하고 독일의 작은 클럽 자르뷔르켄을 통해 유럽 땅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이후 2부 리그에서 나름 실력을 발휘해 2년 후 아인트라흐트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전성기를 열었다. 허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예보아는 몰지각한 인종 차별주의자들로부터 심각한 괴롭힘을 당했다. 예보아를 비롯해 슐레이만 사네(注: 맨체스터 시티에서 뛰고 있는 르로이 사네의 아버지다)·앤서니 바포에 등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던 흑인 3인방은 그야말로 집중 타깃이었다고 한다. 터치라인에 다가서면 바나나 껍질이 날아들고, 원숭이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예보아처럼 뛰어난 활약을 펼칠수록 그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심지어 같은 팀 팬들로부터도 모멸적인 인종 차별 구호를 들어야 했을 정도로 그들은 천대받았다.


아무리 화난다고 해도, 프로 선수가 돈을 받고 경기를 즐기는 팬들에게 덤비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그 점을 잘 아는 예보아도 처음에는 묵묵히 참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인종 차별을 끝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예보아는 자신처럼 인종 차별에 시달린 사네·바포에와 더불어 공식 성명을 발표해 경기 중에 당한 인종 차별 행위를 고발했다.


“우리에게 울부짖는 녀석들이 수치스럽다”라는 문구는 바로 이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다. 이 기자회견은 당시 독일 사회에 제법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점점 피어올랐던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더욱 가속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사건 이후 예보아 독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됐다.

설치예술가 마티아스 바인뷔르터와 프랑크푸르트 시민이 직접 제작했다. @마티아스 바인퓌르터 제공
“예보아를 포함한 세 선수가 당시 공개적으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건, 축구 경기장은 물론 독일 사회를 용기 있는 움직임이자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 마티아스 바인퓌르터


20년이 넘는 긴 세월이 흐른 후인 지난 2014년, 프랑크푸르트 출신인 마티아스 바인뷔르터라는 설치예술가가 이 사건을 떠올렸다.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던지는 설치 예술품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은 이 청년의 대형 프로젝트가 바로 예보아 하우스였다. 이 작품의 배경이 궁금해 인터넷에서 수소문해 그에게 이메일을 인터뷰를 시도했더니 이런 답변이 왔다.


바인뷔르터에 따르면, 니더라드 인근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보아의 얼굴과 메시지를 통해 인종 차별을 경계하도록 하겠다는 이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일단 캔버스 구실을 할 큰 건물을 섭외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게다가 제작비라는 현실적인 고민 역시 바인뷔르터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그는 헤쳐 나갔다. 원동력은 바로 아인트라흐트 팬들의 힘이었다. 아인트라흐트 광팬이었던 건물주는 기꺼이 자신의 아파트 한 면을 캔버스로 기증했다. 여기에 아인트라흐트 팬들이 직접 작업에 동참했다. 심지어 라이트를 켜고 철야 작업까지 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보아의 거대한 얼굴을 그리기 위해, 그리고 과거 자신들이 한 옳지 못한 야유에 대한 참회의 마음을  담기 위해 붓질을 이어나갔다.

현장을 찾아 친필 사인을 남기는 예보아 @마티아스 바인퓌르터 제공

팬들의 사랑으로 만든 작품, 예보아 하우스가 대중에 공개된 건 2014년 여름이었다. 제막식에는 프랑크푸르트 시장 등 지역 내 유명 인사는 물론이며, 주인공은 예보아까지 참석해 직접 친필 사인까지 남기며 자신을 향한 찬사에 대해 흐뭇해했다는 후문이다.


“저는 이 프로젝트가 지금도 유럽 내에서 만연하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와 싸우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예보아 하우스는 인종차별과 싸우려는 프랑크푸르트 사람들의 공개적 의사 표시이자 거대한 공동체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결코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는 거죠.”


바인뷔르터는 예보아 하우스에 대해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프랑크푸르트 사람들은 인종 차별에 대해 명확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해서 혹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한다면 대중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려던 예술가, 레전드를 기리려는 팬들의 열정, 그리고 과거 인종 차별 행위를 저질렀던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녹아 있는 이 작품을 결코 놓치지 말길 권하고 싶다. 예보아를 향한 변치 않는 팬들의 사랑에 흐뭇함을 느낄 것이다.

인종 차별 피해자에서 영웅으로 거듭난 예보아 @마티아스 바인퓌르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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