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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Oct 31. 2019

그곳에 아약스의 영광이 살아있다

암스테르담 요한 크루이프 루트 ①

땅거미가 진 암스테르담의 아름드리 운하 @풋볼 보헤미안

암스테르담은 정말 매력적인 도시다.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집들, 도시 곳곳을 가르는 멋들어진 운하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무척 아름답다.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던 독일을 막 벗어난 후 만난 암스테르담은, 마치 이런 게 유럽의 경치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땅거미가 진 후 암스텔 강 운하 주변을 거닐며 즐겼던 암스테르담의 아름드리 모습은, 그래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해 말로는 수없이 들었던 홍등가와 마리화나 가게의 실제 모습을 접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을 가게들을 마치 편의점처럼 거리에서 쉽게 접하며, 암스테르담은 다른 도시는 가지지 못한 퇴폐미까지 가졌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이 홀딱 반할 수밖에 없는 섹시한 여자 같은 느낌을 주는 도시, 암스테르담이다.     


네덜란드의 상징 아약스, 그리고 하이네켄 맥주. 하이네켄 맥주는 개인 취향이다 @풋볼 보헤미안

암스테르담은 축구적 측면에서도 매우 훌륭한 도시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 아이아스처럼 그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를 짓뭉개며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에서 지배자로 군림했던 클럽, 나아가 ‘빅 이어’를 네 차례나 들어 올리며 유럽 클럽 축구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했던 아약스의 근거지가 바로 암스테르담이기 때문이다.     


이 아약스를 접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암스테르담은 축구팬들의 가슴을 뛰게 할 힘을 갖고 있는 도시다. 그런데 이 클럽의 거대한 명성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았으면 한다. 축구와 관련해서는 모든 것이 아약스로 통하긴 하지만, 그 아약스가 암스테르담과 네덜란드 축구 이야기를 전부 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이 아약스보다 우월한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 나아가 축구라는 스포츠의 패러다임을 바꾼 불세출의 천재 축구 선수 요한 크루이프가 주인공이다. 작금 아약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저 멀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의 지금 명성과 위상을 확립시킨 인물인 만큼, 도리어 이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암스테르담의 축구를 바라본다면 더 색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일명 ‘요한 크루이프 루트’가 존재한다. 이 크루이프 루트는 암스테르담 관광청이 요한 크루이프 재단과 함께 조성한 열네 개의 관람 포인트를 연결한 것을 말한다. 이 루트의 거리는 대략 13㎞에 달한다.      


주요 방문 장소는 큰 맥락에서 세 곳으로 압축할 수 있다. 크루이프의 유년 시절과 과거 아약스의 홈구장 드 메어가 자리했던 에스플라나데 드 메어(Esplanade de Meer), 1928 하계 올림픽의 메인 스타디움이자 과거 로테르담의 드 쿠이프와 더불어 네덜란드 대표 축구 경기장으로 기능했던 암스테르담 올림픽 주경기장, 그리고 현재 아약스의 홈 경기장인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다.      


에스플라나데 드 메어→ 올림픽 주경기장→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 순으로 이동하는 게 정석이나, 만약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의 투어 일정에 영향을 받게 된다면 역순으로 이동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에스플라나데 드 메어를 알리는 표지판, 그리고 크루이프 생가 외벽 @풋볼 보헤미안

그중 에스플라나데 드 메어를 가장 먼저 소개한다. 이곳을 찾았을 때, 실로 ‘숨겨진 진주’를 캐낸 느낌이 들었다. 첫인상은 좀 실망스럽긴 하다. 얼핏 보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가처럼 비쳐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곳에는 크루이프가 나고 자란 ‘크루이프 생가’를 비롯해 꼬마 시절 뛰어놀았던 운동장과 학업을 배운 초등학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천천히 걸으며 전설의 유년 시절을 상상해보며 사색에 젖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큰길을 끼고, 크루이프 생가가 자리한 블록 맞은편에 자리한 평범한 아파트 단지에는 아약스의 황금기 역사가 마치 숨바꼭질하듯 숨죽여 자리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1998년 문을 닫은 드 메어의 옛 터이기 때문이다. 드 메어는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명장 리누스 미헬스 감독과 크루이프가 아약스를 세계적 강팀으로 올려놓았던 터전이었다. 바로 이 경기장을 홈으로 쓸 때 네 번이나 유럽 정상에 올랐다. 크루이프뿐만 아니라 마르코 판 바스텐·파트릭 클루이베르트·클라렌세 세도르프·에드가 다비즈·에드빈 판 데 사르 등 ‘오렌지 군단’의 레전드가 화수분처럼 쏟아졌던 곳이기도 하다.     


세계 최강의 전력이었던 과거에 비한다면 정상에서 멀어져 버린 지금의 아약스 처지는 조금 안타깝긴 하다. 그래도, 그들의 화려했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 역시 아니다. 그래서 아약스 팬들에게 드 메어의 옛터, 즉 에스플라나데 드 메어는 일종의 성지와도 같다. 아무리 최첨단 신식 스타디움이 새로 주어졌다고 한들, 그 영광의 역사가 있었던 곳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건물 기둥에 새겨진 아약스의 전성기를 묘사한 그림 @풋볼 보헤미안

건물 곳곳을 세세하게 살피면 절로 아약스의 황금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타일 기둥에는 빅 이어를 들고 개선하는 과거 아약스 선수들, 영웅이 된 선수들을 보고 환호하는 팬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아파트 단지 곳곳에 흐르는 개울에는 작은 다리가 놓여 있는데, 요한 크루이프·예사이아 스바르트·피에트 카이저·게리 뮈렌·뤼트 크롤·요한 네스켄스·배리 헐스호프·딕 판 다이크·아리에 한·빔 수비에르·호르스트 블란켄부르크·벨리보르 바소비치·행크 스투이·리누스 미헬스 등 숨 가쁘게 소개한 그들의 영웅들이 작은 다리의 이름으로 붙여져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각 길에도 이름이 지어져 있다. 그 거리의 이름은 안필드 로드·베르나베우호프·스타드 드 콜롬베스·델레 알피호프·프라터란·웸블리란이다. 이중 몇몇 거리 이름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면 그 감은 매우 정확하다.      


이 거리들은 안필드·델레 알피·산티아고 베르나베우·웸블리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스타디움에서 명칭을 따왔다. 스타드 드 콜롬베스는 1907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장한 유서 깊은 경기장이며, 델레 알피는 드 메어처럼 지금은 사라진 과거 유벤투스의 안방 이름이다. 프라터는 현재는 에른스트 하펠 스타디움이라 불리는, 빈에 자리한 오스트리아 축구 성지다.      

1970-1971시즌 유러피언컵 우승을 기념하는 외벽, 당시 경기가 웸블리에서 벌어졌다. @풋볼 보헤미안
1966-1967 유로피언컵 2라운드 리버풀 원정 경기를 기념하는 벽화. 당시 아약스가 5-1로 대승했으며, 역대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 @풋볼 보헤미안

이 경기장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아약스가 유럽 클럽대항전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곳이라는 점이다. 이중 웸블리와 프라터에서는 유러피언컵(現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따냈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깊다. 암스테르담에서 멀리 떨어진 생뚱맞은 경기장의 이름을 거리에 붙인 이유, 당연히 옛 아약스 선수들이 거둔 전설적인 승리를 결코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다.     


여기까지 살핀 것도 그 재미가 쏠쏠한데, 진짜 하이라이트는 따로 남아있다. 바로 거대한 크루이프의 벽화다. 오렌지 유니폼을 입고 필드를 호령하는 크루이프의 생전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그라피티는 지난 2017년에 만들어졌다. 2016년 크루이프가 폐암으로 세상을 등진 후 전 세계 축구계가 깊은 슬픔에 잠겼을 때, 브라질 거리 예술가인 파울루 콘센티누가 이를 추모하기 위해 크루이프 재단의 협조를 얻어 만든 작품이다.      


이제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된 축구 영웅 크루이프이지만, 이 외벽을 직접 눈으로 살피면 한창때 그의 활약상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솟구쳐 오른다. 예술적으로 문외한이긴 하나, 그라피티의 천국이라는 유럽에서 접한 작품 중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그라피티였다. 암스테르담을 방문할, 축구에 미쳐 있는 이들에게 꼭 보여주고픈 아름다운 벽이었다.

요한 크루이프의 타계 이후 그려진 거대한 벽화, 에스플라나데 드 메어의 상징이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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