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서수 단편 「엉킨 소매」의 경우
임신중절 논쟁은 흔히 “태아는 어느 시점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내지 “태아는 과연 인간인가?”를 따지는 인간임(personhood)문제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태아의 인간임 논쟁은 미끄러운 경사길 논변에 의해, 어떤 입장을 취해도 결정적인 답변이 될 수 없어 지루하게 계속될 뿐 종결되지 않았다. 이에 J. 톰슨이「낙태 옹호론」이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태아가 인간이라고 전제해도 낙태가 정당화된다는 논변을 펼침으로써, 낙태문제를 여성의 권리 對 태아의 권리문제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했다.
그렇다고 이서수 단편「엉킨 소매」가 임신 중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전면화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소설에서 인물에게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남자친구 ‘경현’과 섹스를 했고, 그런데 “얇은 막 하나 차이가 얼마나 큰”(132쪽)지 남자친구가 몰각한 탓에 임신을 했다는 것. 그런데 “도대체 왜 콘돔을 뺀 거냐”는 나의 힐난에 남자친구는 나의 동의를 얻었다고, 그 상황을 녹음을 해 두었고, 믿을 수 없을 땐 녹음하는 수밖에 더 있느냐고 도리어 되묻는다.(133쪽) 이제 소설의 인물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6주 된 태아를 낙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소설은 여성 인물이 초음파 검사와 수술을 전후한 때에 겪게 되는 혼란과 주변 인물들의 반응 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하니 임신 혹은 임신 중지에 관한 윤리적 판단의 문제가 소설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엉겨 붙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을 말하다가 상대를 다치게 하고, 자기도 다치는 사람들, 그러나 결국 서로 소매가 엉킨 채로 함께 걸어갈”(156쪽) 인물들의 타인을 향한 배려와 존중과 연민에 관한 것(그런데 여성들 사이에서만)이라 할 수 있다.
이서수 단편「엉킨 소매」가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 곧 임신과 그것을 바라보는 (특히 남녀) 인물들의 관점의 차이는 이 소설이 임신 중지와 관련한 윤리적 문제를 전면화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서 남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일반화 문제가 그러하다. 소설이 현실 세계를 일정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예컨대 구병모 장편소설『네 이웃의 식탁』의 경우 남자들이란 이웃집 여자에게 치근대거나(신재강의 경우), 경제적으로 완전히 무능하거나(전은오의 경우), 아니라도 보잘 것 없는 상황(고여산의 경우)에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대신에 여성 인물들은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육아를 계획해서 실행에 옮기거나(홍단희의 경우), 남편을 대신해서 생활비를 벌어오거나(서요진의 경우), 아이를 돌보면서 그림책 삽화를 그리거나(조효내의 경우), SNS를 통해 중고물품을 거래하는(강교원의 경우) 등의 보다 적극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여성들의 삶 역시 위태로운 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구병모 장편소설『네 이웃의 식탁』은 남녀역할의 전도- 젠더의 구성과 배열을 전복함으로써 남성 가장과 여성 주부의 성 역할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존의 가족주의적 젠더 체제를 일정하게 해체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남녀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일 수도 있고, 그것이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소설 내 인물들에 대한 성격 부여가 기왕의 페미니즘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자칫 남성=악, 여성=선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답습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염려가 없지 않다. 특히 ‘서여진’에게 치근대는 ‘신재강’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는 자칫 주어진 남성지배 질서 안에서 여성은 체제와 구조의 피해자라는 단일범주로 고정됨으로써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어떠한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문학이 현실을 그림으로써 그 너머의 모습을 지향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아쉬운 대목이다.
그런데 이서수 단편「엉킨 소매」에서 여성 인물 ‘나’와 함께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임신 6주째라는 것을 확인한 후 남자(경현)의 반응은 어떠한가. 아니 ‘경현’의 반응을 그리고 있는 여성 인물 ‘나’를 통해 전달되는 그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나와 함께 태아를 확인한 경현은 진찰실에서 나오자마자 말했다. 그게 아팠어? 작던데 아팠냐고? … 내 거가 저 기구보다 작은 거처럼 느껴졌어”(131쪽)라고 말하거나, “검사비를 내고 돌아서자, 경현이 감사비와 수술비의 절반을 송금해 주었다.”(132쪽)거나, “너도 낳고 싶지 않잖아. 왜 나한테 시비야.”(132쪽)라거나, 섹스를 할 때 콘돔을 빼도 되느냐고 나에게 묻고 혹여 나중에 그게 탈이 날까 봐 나의 대답을 녹음해놓기도(133쪽) 하고, “택시 왔어. 경현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잘 가라는 의미였다. 경현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134쪽)라는 화자의 다짐 등을 통해 독자는 그녀의 남자친구 ‘경현’에게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될까? 무책임하고, 성의 없고, 태아는 물론이고,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임신을 하게 된 여자 친구에 대해 결코 진심이 아닌 관계를 맺었던 자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 될 것은 정한 이치 아닐까.
무엇보다 이 소설의 여성 인물이 겪는 불안정한 심리, ‘주영 씨’가 새벽 4시 18분에 보낸 장문의 카톡 속 이야기(인도의 어느 가정에서 일어난 여아살해 이야기)를 통해 “여아 살인과 임신 중지는 전혀 다른 일인데 그걸 왜 묶어서 생각하는지”(139쪽)하는 불만, 그러니까 타인(주영 씨)이 나의 선택에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에 대한 불편함, 미국에서 임신 중지권을 박탈한 법안이 통과됐다는 뉴스를 검색하면서 배가 당기듯 아파서 운다든가 하는 것. 다들 임신 후 선택에 윤리적인 판단을 내린다고, 중요한 것은 임신 자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라고 말하는 ‘주영 씨’에 대한 반감 등, 임신과 임신 중지에 따른 여성 인물의 우울증과 신경증이 두드러지게 묘사되고 있는 반면에 남자친구는 그 모든 일에서 무관한 듯 행세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문제라는 것.
실제로 여자 친구가 임신을 하면 남자(들)은 대부분 도망간다고는 그러던데, 왜 남자들은 그 모양일까 하는 것. “원래 다 이런 거 아닌가, 연애는 다 이런 거 아니야?”(133쪽) 하는 여성 인물의 발화는 그것대로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른 문제는 ‘주영 씨’의 생각과 말. 그녀는 “다들 임신 후 선택에 윤리적인 판단을 내린다고, 중요한 것은 임신 자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라고, 더구나 “좋은 임신이 있고 나쁜 임신이 있다.”(150쪽)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좋은 임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최근 서울시 의회 어느 의원이 서울시교육청에 의뢰했다는 조례(개정안) 중에서 “성관계는 부부관계에서만 가능”하게 하자는 것과 같은 종류의 봉건적 윤리 규범 내에서의 임신만을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니까 이서수 단편「엉킨 소매」에서 (여성)인물들은 임신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의 경우 결혼이라는 제도 내에서가 아닌 한 타인의 불편한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주영 씨’가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사촌의 경우를 들어, 자신의 엄마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고 같이 병원에 갔지만 결국 모녀 사이가 서먹해지고 연락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미혼인 여성의 임신 그 자체에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보여주고 있는 것.
임신 중지의 문제를 우리 사회 주류적 시각은 여전히 여성의 (자신의) 몸에 대한 주체적 판단, 의사결정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대신 태아가 언제부터 생명체인지,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살인인지 아닌지 하는 논쟁에 매몰되어 있다. 이서수 단편「엉킨 소매」의 인물이 갖고 있는 불안한 심리와 행위에는 결혼한 여성이 부득이하게 임신 중지를 해야 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압력과 그에 따른 윤리적 판단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그런데 소설에서 나의 친구인 혜정과 나보다 나이가 좀 더 많은 주영, 이 세 여성 사이의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민(그것은 오직 같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경험을 통해 겪었던 공통의 감각에 기반해서, 여자 몸은 누구나 간섭할 수 있는 공공 자산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적 감각의 공유를 통해서) 이, 세상이 윤리적 판단의 잣대로 여성의 임신에 대해 갖는 불편한 시선을 견디고, 사실 임신이라든가 임신 중지의 문제를 넘어서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곧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면 보이는 우리의 얼굴은 저마다 다르게 생겼을”(156쪽)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늘 기다리는 사람들이겠지 하는 마음. 자기 생각을 말하다가 상대를 다치게 하고, 자기도 다치는 사람들이겠지”하는 마음. 그렇게 우리는 서로 소매가 엉킨 채로 함께 걸어갈 것이라는 다짐. 그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이서수 단편「엉킨 소매」의 매우 중요한, 소중한 주제라 하겠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앞에서도 제기했던 것처럼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것이겠다. 더 정확하게는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서 보이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이 좋은 소설, 좀 더 풍부하게 읽힐 가능성 있는 소설들을 일정한 한계 내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글에서는 “18세기 미국에서 출현한 이후 1970-80년대를 거치며 성장하고 변모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의 스타일” 그 자체에 관해 길게 논할 생각은 없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정의를 빌려 정치적 올바름이란 “자신이 ‘진리’의 목격자이자 수호자라는 확신이 강한” 하나의 스타일로서, “자유주의자나 좌파들뿐 아니라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파들이 전유하기도 하다”는 것, 정도의 전제 내지 이해를 바탕으로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하나의 태도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러자니 “하지만 이 살균된 문화는 사실 병든 문화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것을 살균시킴으로써 이 문화는 살균된 깨끗함 너머에 있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을 보지 못하게 하며, 올바름을 외치는 ‘나’의 모순과 분열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고 강조하는 논의에 대해 일정한 공감과 함께 그보다 더 많은 비판적 생각을 갖게 된다는 점을 밝혀두기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