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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ul 02. 2021

수입맥주에 대한 아주 사적인 기억

하와이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6년 1월)

하와이 가던 비행기에서 처음 마셔 본 하와이 맥주



 10년도 더 지난, 아니, 정확하게는 18년 전의 일이다.


 술이라는 걸 이제 갓 입에 대어 본 스무 살. 실은 그 전에도 어른들 몰래 맛은 봤지만서도, 여하튼 맥주라고는 하이트, 카스, 오비밖에 모르고 살았다. <삼국지>의 천하삼분지계도 아니면서 어째서 세 개의 브랜드가 맥주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았을까. 그마저도 그냥 맥주가 아니라 절반쯤은 소주와 섞여있는 소맥을 주로 들이켰으니 오롯 '맥주의 맛'이라는 건 알지도, 굳이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느 날 친구 J가 낯선 맥주를 한 병 들고 왔다. 그동안 본 적 없던 희한하게 생긴 병에 담긴, '호가든'이라 부르는 맥주였다. 먼 다를 건너온 수입맥주라고 했다.

 "야야, 맥주 이름에 무슨 가든이냐. 고깃집에서 마셔야 되는  아?"

 처음으로 마주한 낯선 음료에 말 같잖은 소릴 농담이랍시고 던졌다.

 "에라이, 이 촌놈들아. 니들이 게 맛을, 아니, 맥주 맛을 알어?"

 J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우릴 흘끗 쳐다보고 나선 맥주를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동안 본 적 없던 희한하게 생긴 각진 컵에다가.

 "육각형의 전용잔에 맥주를 절반 정도 따라놓은 후에, 병을 가볍게 휘휘 흔들어서 아래쪽에 가라앉은 효모가 올라오도록 잘 섞고서, 나머지 절반을 잔이 가득 차게 따라주면 된다 이거지. 이거 봐라, 짠."


 와인으로 치면 소믈리에처럼, 정성스레 맥주를 잔에 따르는 그 모습이라니. 딱 보기 좋 만큼의 거품까지 포함해서 잔을 한가득 채웠는데 그 모양이 가히 아름다웠다. 우리는 넋을 잃고 맥줏잔을 바라봤는데, 그 모습을 비유하자면 선진 세계 문물을 처음 접하는 개화 이전의 원주민 얼굴 같았으려나. 아프리카 부시맨에게 코카콜라를 가져다준, 마치 서구의 선교사 같았던 J는 무척 멋있어 보였다. 물론 그 녀석이 멋있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잔뜩 기대를 머금은 채 따라놓은 그 맥주를 한 모금 마다. 소맥 따위를 100미터 달리기 하듯 숨 가쁘게 들이켤 때와는 다르게 아주 천천히. 마시기 전에 코로 향을 느끼고, 입에 살짝 머금고, 혀를 돌려가며 맛을 보고, 마침내 꿀꺽하는 목 넘김까지 조심스럽게. 온몸으로 맥주를 감각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맥주가 이렇게나 맛있을 수가 있나. 시는 순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머리가 반쯤 벗겨진 수도승들이 수도원 한켠의 양조장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합창하며 정성스레 술을 빚는 장면이 눈앞에 일순 펼쳐졌. 아, 아멘. 알지도 못하는 성호를 그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의 맛이로군요.


 그동안 마셔왔던 맥주라는 이름표를 단 음료들은 대체 뭐였을까. 배신감이 밀려왔다. 이런 맛이라는 게 있는 줄 그동안 전혀 몰랐었다. 살다 보면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무너지는 때를 종종 경험곤 한다. 조중동의 보수 신문만 읽다가 한겨레나 시사인 같은 진보 매체를 접했던 때, 빨래는 으레 건조대에 펼쳐서 말리다가 어느 날 들여온 건조기가 삽시간에 마른 옷들을 내놓을 때, 임원진과 함께한 출장이었기에 매번 타던 비행기 이코노미석이 아니라 비즈니스석을 몸을 뉘었을 때. 아이 없이 둘만 살다가 산부인과 초음파실에서 아이 심장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 등등. 우리는 고작 맥주 한 잔을 마셨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과거와는 영 작별을 고하고서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자나 깨나 수입맥주가 눈에 어른거려 찾아 헤매기 시작한 때가. 지금이야 누구나 쉽게 마시고들 있지만, 그 시절엔 수입맥주라는 게 흔하지 않았다. 마시는 사람도 몇 없었고. 편의점은 고사하고 대형마트에 가야 간간이 몇 개씩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강남이며 이태원 등 이곳저곳의 이름난 맥줏집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수입맥주를, 아니, 그 향과 멋과,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섞여있는 허세 비슷한 걸 마시기 시작했다. 이제 갓 맥주 맛에 눈을 뜬 이 세계의 어린아이 따위가 맛을 제대로 알기나 했나. 카스 따위들보다 더 멋있어, 그러니까 '맛있어'가 아니라 '멋있어' 보이니까, 일단 마셔보는 거였다.


 아직은 아내가 되기 전이었던 여자 친구가 결혼 전에 살던 이태원에서도 맛있는 외국 맥주를 많 마셔볼 수 있었다. 해밀튼호텔 뒷길에 자리 잡고 있었던, 지금은 없어진 '116-7번지'라는 펍에서 매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때 가장 좋아했던 술은 이제는 익숙해진 호가든도, 파울라너도, 헤페바이젠도, 과일맛 나는 람빅도, 쓴맛 나는 인디언 페일 에일도, 고수가 되면 그제야 참맛을 알게 된다는 신맛의 사우어 맥주도 아니라 끝 맛이 달큼하고 목넘김이 부드러운 '허니 브라운'이라는 맥주였다. 소량이지만 진짜 꿀이 들어간 맥주. 게다가 비싸지도 않아서 많이도 마셨더랬다.


 감히 취업준비생 주제에 퍽이나 많이도 마셨다. 그나마 과외 알바를 했으니 지갑에 쬐금은 돈이 들어있긴 했는데, 이태원의 펍은 지금도 그렇듯이 그때도 역시 여간 값이 비싼 게 아니었다. 술을 마시다가 그녀가 행여나 코스모폴리탄을 한 잔 더 시키면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어떡하지, 쟤는 왜 만날 양도 적고 비싸기만 한 칵테일을 마실까, 나도 맥주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 잠깐, 지갑에 지금 얼마가 들어 있더라...'  

겉으로는 미소를 띠면서 술을 들이켰지만, 얇은 지갑 탓에 머릿속으론 계산기를 정신없이 돌려야만 했다. 갑 사정에 맞춰 최대한 마셔댔던 날들. 때의 우리는 대체 무슨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있었길래 그토록 술을 채워넣으려 했을까.


 유럽의 토양은 석회질로 돼있어서 물이 깨끗하지가 않다. 때문에 예전의 유럽인들은 물 대신 맥주나 와인을 마시느라 늘 취해 있었는데, 커피가 들어오면서 마침내 다들 각성을 하고 이성과 계몽주의가 발달했다고들 한다. 그건 유럽 사람들 이야기고. 취준생이었던 그때도, 중견 직장인이 된 지금도 나는 커피를 마실 때처럼 또렷하게 깨어있기보다는, 늘 허니 브라운 같은 달콤한 맥주를 마신 듯 꿈에 취한 듯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라는 게 늘 이성과 합리를 따지면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건 아니잖나. 그런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자 여전히 맥주를 좋아한다. 그것도 그냥 맥주가 아닌 맛있는 맥주, 기왕이면 그동안 먹어보지 못했던 낯선 이국의 맥주을.


 산기를 돌려가며 만나던 그녀와 8년의 연애 끝에 드디어 결혼했다. 신혼여행을 가던 하와이안 항공 기내에서 또다시 새로운 맥주를 만났다. 기내에서 나눠주던 낯선 하와이산 주. 마우이 브루잉의 '비키니 블론드 라거'였다. 한 모금 마셔 보니 부드러우면서도 너무 청량하지도 너무 쌉쌀하지도 않은 적당한 맛이었다.


"이거 하와이의 마우이 양조장에서 만들었나 봐, 신기하다."

"다른 데서는 팔지 않을 거고 여기서밖에 마실 수 없는 거잖아."

 "캬아ㅡ 좋네. 이게 바로 하와이의 맛이로구나."

 "이거 인터넷으로 직구 같은 건 가능하지 않을까?"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 찾아봐야겠다."


 리는 신이 나서 내리 두어 캔을 연달아서 계속 마셨다. 실제로 맛이 좋은진 모르겠지만 그저 기분이 좋아서 더 맛있고 더 빨리 취하는 느낌이었다. 어제 결혼했는데 사실 하와이 맥주면 어떻고 하이트, 카스, 오비 따위를 마셨어도 어땠으랴, 무얼 마셔도 좋았을 게다. 술의 맛을 좌우하는 갱이는 술이 지닌 맛 자체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날 함께하는 사람, 함께 있는 장소와, 함께 있는 시도 하니까. 앞으로 어떤 낯선 맛있는 맥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어떠한 결혼 생활을 우리가 함께하게 될지 기대는 그때 그날이었다.


 하와이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6년 1월, 하와이에서)

하와이 하나우마 베이
레이싱 게임에서나 보던 야자수들
와이키키 해변에서 신혼부부 스냅 사진 찍기
비가 살짝 내린 뒤 고개를 살짝 내밀던 무지개
쿠알로아랜치에서 사륜 ATV 타면서
유명한 버거집 치즈버거 파라다이스에서 마셨던 알로하 라거. 그러고보니 이거도 하와이 맥주
여행이 끝나갈 때마다 선물 고민을 하게 된다. 하와이는 역시, 대한항공을 떠올리며 마카다미아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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