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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20. 2021

엄마의 손맛이 뭐길래

로마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6년 7월)

울엄마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셨음에도 왠지 엄마의 손맛이라는 게 느껴지던 식사




 로마에서의 이튿날이었다. 카로운 알람 소리가 귓가를 다. 침 햇살이 감긴 눈을 간질이기도 전에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눈을 몇 번 깜빡여서 아직 어둑한 사위를 조금씩 분간해갔다. 정이 바쁜 날이라 일찍부터 움직여야 했다. 대충 씻고 대충 옷을 챙겨 입고,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대충 때울 수 없는 호텔 조 든든히 챙겨 먹은 후 길을 나섰다.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역시 테르미니 전철역에서 여정을 시작. 1.5유로짜리(2016년 기준) 편도 티켓을 끊고 B 노선으로 두 정거장이면, 콜로세움이 있는 콜로세오 역에 도착했다. 


 이 스마트폰으로 구글맵을 켜지 않고도 내려야 할 곳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명 관광지이니만큼 전철 칸의 거의 모든 사람이 여기서 우르르 내리기 때문이다. 파에 휩쓸려 자연스레 따라 내리면 됐다. 여행지에서의 길 찾기는 역시 도구보다는 감. 거북이처럼 고개를 숙여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오히려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종종 생각하곤 한다. 문명의 이기에 너무 기대다 보면 본타고났 감각이 점점 무뎌지다가 종내에는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길 찾기뿐만 아니라 처음 들른 식당에서 괜찮은 메뉴 고르기, 시장에서 집은 물건이 비싼지 아닌지 가늠하기, 낯선 상대의 행동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구분하기 등의 일에서는 구글맵 같은 도구가 없. 설사 도구가 있더라도 미덥지 못 테니 정량의 본능적 감이라는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도착해서 전철역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눈앞에 콜로세움이 짠, 하고 나타났다. 말 그대로 짠. 이나 영상에서보던 그것이 바로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런 걸 당황스럽다고 해야 하나 황당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대관절 저게 왜 지금 여기에 있지, 하는 게 첫 감상이었다. 난데없 장면 생경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역사적인 유적지 바로 옆에 전철역이 있어도 되 건가. 하루에도 몇십 번씩 전철이 오며 가며 땅이 흔들릴 텐데 무려 서기 80년에 지어진 오래된 석조건물인 콜로세움은 괜찮으려나. 듭된 진동이 이어지다 보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와르르 무너지는 건 아닐까. 탈리아 문화재청 양반들, 거 참 되게 나이브한 사람들이로구먼. 그나저나 나는 세계의 온갖 문화유산들을 염려하느라 바쁜 유네스코 직원도 아니면서 왜 남의 나라 문화재 걱정을 하고 있는 걸까.


 쓸데없는 오지랖은 떨쳐 버리고 콜로세움에 들어가기 위한 줄을 섰다. 아니, 그 전에 콜로세움 입장권을 사는 줄을 먼저 섰다. 입장 대기줄만큼이나 매표소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인터넷 검색 해 보니 좋은 팁 발견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 근처 포로 로마노 입구에서도 콜로세움과 묶어서 입장권을 팔고 그곳의 줄은 훨씬 짧다고 했다. 잰걸음으로 바삐 가 보니 정말이었다. 끝이 보이는 줄에서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런 사실 모른 채 콜로세움 매표소에서 긴긴 줄을 선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게 바로 문명의 이기를 통해 얻은 정보의 힘이다. 현대사회에서 승자가 되려면 정보가 가장 중요하다고.'면서.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름지기 본능적인 감각 어쩌고 하더니만 사람 마음이 가을 억새풀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어마어마한 줄을 서야 했다. 입장 을 빠르게 통과하게 해 주는 정보는 없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한참 서 있다가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콜로세움 내부에도 역시나 그늘 한 점 없었다. 수리에 화로를 얹은 듯 고통에 시달리며 제대로 보는 둥 마는 둥 다.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서 검투 경기를 볼 때 볕이 심한 날엔 미세노에서 파견 나온 해군 병사들이 차양막을 쳐 줬다고 한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는 데다 점심 도시락과 포도주까지 공짜로 제공됐다고. 시민들에게 그야말로 '빵과 서커스' 제공서 세상 시름도 잊고, 정치에 대한 관심도 희미지게 만든 것. 런데 이런 땡볕에, 수많은 인파에, 죽여라 살려라 외치는 흥분의 도가니장이었으면 누구 하나 쓰러져도 모르겠다. 나 역시 마찬가지. 검투사보다 내가 먼저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빨리 아무데나로 가서 시원한 맥주 한 잔 걸치고 싶다.

 

 콜로세움을 나와 구글맵을 켰다. 인근 맛집으로 가는 길을 검색했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는 어째서인지 우리를 배반했고 그 탓에 한참이나 헤맸다. 원래 가려던 별점 4.5개짜리, 미리 별 표시를 찍어 즐겨찾기까지 해 뒀던, 식당은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대신 길거리의 이름 모를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구글맵엔 아예 뜨지도 않는 조그맣고 허름한 가게였다. 아내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평점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고 보자. 지금 죽을 것 같아. 아무데나에서 아무거라도 먹고 마셔야겠어."

 "나도 그래. 괜히 헤매지 말고 저기로 바로 들어가자."

 아내 역시 지친 얼굴로 화답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들어갔던 이곳이 이번 이탈리아 여행 중 첫째로 꼽을 만한 식당 줄이야. 문명의 이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우리는 고의 선택을 다. 그렇다. 세돌의 한 판처럼 간이 구글을 이긴 것. 이것이 바로 도구와 기계 따위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본능적 감각의 힘이다.


 주문한 펜네 파스타, 라자냐, 그리고 시원한 페로니 맥주 두 병이 나왔다. 우선 맥주부터 한 잔 들이켜고 포크에 한가득 라자냐 한 입. 음식 입에 넣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어머니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왠지 '엄마의 손맛'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정신없이 먹고 마 그릇을 비웠다. 이어지는 후식도 달콤다. 어째서 이국의 땅에서 불현듯 엄마 밥이라는 걸 떠올렸을까. 라자냐 때문이려나. 이 요리는 오래전에는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서 생일, 크리스마스, 결혼식 피로연 같이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 하지만 오늘날는 토요일부터 준비해서 일요일 점심에 온 가족이 모여서 먹는 전형적인 가족 메뉴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정식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요리를 먹어서일까, 고 허름한 식당이었지만 정갈한 분위기여서일까, 푸근한 인상의 주인 아주머니가 미소 따뜻해서일까, 켜이 곱게 쌓은 파스타면과 치즈와 고기의 층에서 정성어린 손길이 느껴 걸까. 이유가 뭐건 우리는 그때 그 순간, 분명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있는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엄마의 손맛'이라는 건 대체 뭘까. 은 이들이 어머니의 밥이 맛있다고, 최고라고, 이제는 영영 맛볼 수 없어 그립다고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지며 말하곤 한다. 그 모습이 퍽 부럽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런 게 정말 존재하나, 어쩌면 막연한 환상 같은 것 아닌가, 하고 궁금해진다. 기실 엄마의 손맛, 집밥에의 노스탤지어, 어머니의 된장국, 같은 단어 마음에 와닿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평하자면 우리집 밥은 맛이 없었 때문이다. 어머니가 잘하시는 요리를 꼽으라면 한참을 고민해도 쉬이 입을 지 못하겠다. 봄이면 즐겨먹던 미나리? 제철 나물에 양념만 치면 되니 요리랄 것도 없다. 다른 집과는 다른 알싸한 맛의 동치미? 어머니의 솜씨가 아니라 외할머니의 솜씨였고,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는 그 맛을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요리책을 보 만드신 이런저런 요리? 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실험적인 맛이었다. 남의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이런 맛도 있구나 싶었고, 대학생이 되어 객지 생활을 작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무수히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를 기점으로 매년 허리 사이즈가 늘어나는 중이다.


 럴 만한 사정이 있다. 어릴 적 우리집은 맞벌이 가정이었다. 어머니께서대 근무를 하며 밤늦도록 일하셨다. 도 벌고, 육아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그러니 어떻게 요리까지 잘할 수 었겠나. 어머니도 사람인데. 슈퍼맨도 원더우먼도 아니신데. 매일 밤 피곤에 절어 생기를 잃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밥 따위 아무렴 어떠냐고. 밥 투정 따위 부리면 안되겠다고. 어려서부터 일찍이 체념과 순응이라는 걸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집에 비해 맛있진 않았지만 머니께서 근 전 급하게 차려주 밥을 말없이 먹었다. 주 급할 땐 아버지 밥상을 받을 때도 있었다. 아버지께서 해 주신 밥이 종종 내 입맛에 더 맞았다는 건 어머니께는 비밀이었다. 때론 EBS의 '꼬마 요리사 노희지'따라 가 직접 요리를 하기도 했다. 장계란밥, 김치볶음밥, 팬케이크 등등. 땐 오히려 지금보다 요리를 더 잘했다. 라도 해서 먹어야 한다는 생존본능 절발현서인 듯싶다. 


 문득 생각나는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나오는 말이 있다. '세상 모든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고. 나 원, 이 어머니들에 대한 지독한 고정관념이자 종의 강요 아닌가.  땅의 어머니라면 응당 손맛이 좋아야 하고,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푸근한 미소를 띠어야만 하나. 우리는 왜 어머니, 하면 늘상 그런 것들만 떠올리게 되는가. 그렇다면 맛있는 음식 못 만드시는 나의 어머니 어머니 자격이 없는 건가. 우리 어머니가 뭐 어때서.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혹시나 해서 아내에게물어. 너도 엄마의 손맛이라는 게 늘 그립냐고. 하지만 아내는 코흘리개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아니라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나마나한 질문을 했다. 아내는 개를 갸우뚱거리며 다.

 "엄마의 손맛이라는 건 도무지 모르겠고, 할머니의 손맛이라면 잘 는데..."

 결국 우리 둘 다 엄마의 손맛이라는 건 영영 이해 불가능한 환상같은 것 셈이다.


 젠가의 명절. 온 가족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 이런 날엔 누가 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성적은 잘 나오니, 취업 준비는 잘 되어가니, 결혼은 언제 하니, 애는 몇이나 낳을 거니, 등의 안부를 묻기 마련. 의례 같은 답이 모두 끝나고 잔불 같은 대화가 오고 가던 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잘 먹어서 덩치가 좋은 사촌 형이 농반진반으로 다.

 "어릴 때 너하고 네 동생 되게 말랐었잖아. 그런데 이모네 가서 밥을 먹어보니 왜 그런지 알겠더라. 많이 못 먹겠더라고."

 와하하하하. 다들 무슨 뜻인지 안다는 양 웃음보가 터졌다.

 "맞다 맞아.  진짜 요리 못했제. 억수로 짜거나 억수로 달거나 둘 중 하나였다카이."

 큰이모, 그러니까 어머니의 언니도 맞장구치셨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지만 예전의 우리집 밥맛이 생각나서 도 웃고 동생도 웃고 아버지도 웃고 어머니도 웃고, 잠깐, 어머니도 웃고 계신 게 맞나. 옆에서 얼굴의 반쪽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실은 으로 웃음 대신 울음을 짓고 계신 건 아닐까. 한창 달리고 있던 온 가족의 웃음 열차에서 조용히 내렸다. 더 이상 웃음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도, 여태까지 한 적 없지만 언젠가는 꼭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어머니, 저는 당신 덕분에 뭘 먹더라 먹을 수 있어요. 어딜 가더라도 웬만하면 집밥보다 맛있으니까요. 집밥, 엄마 밥, 손맛 그들이 뭐 별건가요. 런 거 없이도 저도 동생도 잘 컸어요. 세상 모든 어머니가 다 밥을 맛있게 하는 건 아닐 거예요. 당신께서 밥을 잘하셔서 랑하나요? 아니죠. 어머니시니까 사랑하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말씀드렸다간 려 무척 섭섭해하실 것 같다. 그동안 내가 해 줬던 밥이 그렇게나 별로였니, 하시면서. 어째서인지 글을 쓰면 쓸수록 불효자가 되는 것 같아서 이만 줄여야겠다. 


 아 참. 요즘은 밀키트니 배달 음식들이 잘 나와서 여기저기에서 엄마손맛 비슷한 걸 느낄 수 있다. 주 훌륭한 곳의 음식은 한 입 먹으면 눈물을 글썽이며 아아, 엄마! 하고 절로 외치게 된다. 서울 각지에 어머니가 이렇게나 많이 계신 줄 그동안 몰랐더랬다. 이건 뭐, 출생의 비밀도 아니고.



 로마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6년 7월, 로마에서)

콜로세움을 바라보며


저멀리 바티칸의 실루엣이 보이던 로마의 저녁놀


트레비 분수에서 소원을 빌며. 나는 다시 로마로 돌아왔고, 사랑도 이뤘으니 10여 년 전 동전을 던진 보람이 있다


꼭 먹어봐야 한다던 지올리띠 젤라또


매일 밤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있던 레푸불리카 광장


이것이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으로 가는 열쇠', 성 베드로 성당 쿠폴라에서


지붕이 뚫려있는 판테옹엔 비가 내려도 건물 안으로 새어 들어오지 못한다더니 바닥이 비에 젖어 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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