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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Aug 08. 2021

바포레토의 그녀는 팔뚝이 굵었다

베네치아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6년 7월)

1. 바포레토의 그녀는 팔뚝이 굵었다

정류장에 설 때마다 굵은 밧줄을 묶었다 풀었다 해야하는 수상버스 바포레토



 베네치아에선 수상 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를 타고들 이동한다. 전철이나 트램, 지상 버스 같은 건 없다. 아무 여행지에서나 흔히 겪어볼 수 없는, 물의 도시인 이곳에서나 가능해서 그런지 꽤나 다른 경험이었다. 고작 버스 타는 게 이리도 흥미진진한 일이 될 줄이야. 걸어갈 수 있는 짧은 거리더라도 일부러 버스에 오르내리면서 이곳에서만의 즐거을 누렸다.


 물의 버스 정류장에서는 정차, 아니, 정선할 때마다 낯선 장면이 연출됐다. 선착장에 멈추고 나면 힘이 좋아 보이는 선원 한 명이 선체와 선착장 사이를 밧줄로 재빠르게 묶는 모습. 땅 위로 다니는 버스나 자동차가 아니라 물 위를 떠다니는 배인 까닭에, 승객들이 오르내릴 때 배가 흔들거리면 위험하니 굵은 밧줄로 단단히 고정시키는 거다. 잠시 정차한 그 짧은 시간 동안 밧줄을 얼른 감아서 묶고, 승객들이 널판을 밟고 배와 정류장 사이를 오고 가는 게 끝나면, 떠나기 전에 역시나 얼른 다시 밧줄을 풀어야 한다. 일하는 선원들의 검고 탄탄한 팔뚝을 훔쳐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멋지기도 하거니와 이거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겠다면서.


 중독이라도 된 듯 하루에도 몇 번씩 바포레토를 타고 다녔다. 사흘 동안 고 다녔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성 선원 마주했다. 실은 여성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여자가 어떻게 해. 이런 내 걱정은 아랑곳없이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줄을 풀었다 묶었다 다시 풀었다. 전혀 힘들지 않은 듯 오르내리는 손님들을 향해 환한 미소도 지어가면서. 분명 숙련공이었. 그럼에도 왠지 못 미더웠던지 정류장에 내릴 땐 괜히 발밑을 조심하면서 걸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남자 선원 때와는 달리 여자 선원을 오롯이 믿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멋쩍은 마음에 속으로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읊어댔다.


 '이건 성차별이 아니야. 남성과 여성은 신체적인 능력에서 분명 '차이'라는 게 있다니까.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거야.'


 몇 해 전 베네치아의 이름 모를 여선원이 문득 떠올랐던 건 최근 올림픽 양궁에서 전무후무한 3관왕을 달성한 안산 선수에 대한 뉴스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그녀의 대단한 업적을 칭찬하기 바지만 일각에서는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다. 숏컷 머리를 했으니 소위 페미니스트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지 그 이유뿐 아니라 여대에 다니고 있다, '웅앵웅'이니 '오조오억' 같은 극성 여초 커뮤니티에서나 통용되는 용어를 썼다는 등의 이유로 욕을 한다고 들었다. 런데 참으로 의아하다. 녀가 페미니스트면 뭐 어떻나. 그게 그렇게 나쁜 건가. 언제부터 이 사회는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기라도 하면 비난받는 곳이 된 걸까.


 때는 새내기 대학생 무렵이던 2003년의 봄. 신입생 OT에서 난생처음으로 '반성폭력'이라는 단어를 마주했다. 어문계열의 여초 학과이다 보니 대학생이 된 첫날부터 소위 영 페미니즘에 대해 배우게 된 것. 나름의 의식화 교육도 받고 세미나도 참여하고 페미니즘 입문서라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비롯한 책 읽었다. 그동안 남중, 남고를 다니면서 이런 문제의식이라곤 전혀 없었던 지한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 흥미로운 장면격할 수 있었다. 군 제대 후 복학한 남자 선배들은 반성폭력의 '반'자만 들어도 화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저게 대체 무슨 돼먹지 못한 짓거리냐며. 그들의 주장은 요컨대,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한창인 나이에 군대를 끌려갔다 왔는데 여자들한테 무얼 더 양보하라는 거냐."였다. 그렇게, 서로 이해하기에는 머나먼 당신들이었음에도 극단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지않았다. 어찌됐든간에 양성 평등 사회는 옳으며, 그런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수년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의 생각은 썩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니, 오히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와 편견 더 쌓이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혐오되기까지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요즈음엔 초등 남학생들마저도 "쌤, 페미예요?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따위 말을 한다더라. 여성 연예인이 <82년생 김지영> 같은 책을 읽었다고 밝힐라치면 벌떼처럼 모여들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페미X이었구나." 같은 악플을 폭력으로 내뱉는다. 야당의 젊은 대표는 소위 이십 대 남성들을 지지한다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를 애써 감추려들지도 않는다. 러면서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게 다 '한남충'이니 '소추'니, '남자들은 다 죽어야 돼' 같은 극렬 여성 커뮤니티의 반인적 표현들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인 거라고. 웃기는 변명이다. 그렇다면 이전에 뭇 남성들이 써 왔던 무수한 차별적인 용어와 표현과 발언에 대해 여성들로부터 이렇게 공격받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반성이라도 한 적이 있었나.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물론 젊은 남성들의 입장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예전 같은 심한 성차별을 겪어본  없을 거다. 남자든 여자든 별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았을 터.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작스레 양성평등을 추구한답시고 각종 여성 우대 정책들이 쏟아져 . 이에 반해 남자들에게는 딱히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게 없다. 하지만 제도가 변해가는 속도를 의식의 변화는 따라가지 못하는 중이다. "남자가 이 정도는 감내해야지", "결혼할 때 집은 남자 쪽에서 해 와야지", "숙직은 늘 하던 대로 남자가 하고 무거운 짐도 더 날라야지." 시대가 변했다지만 남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은 가부장제 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권리 없이 의무만 여전하니 억울할 만도 하다. 게다가, 큰오빠를 위해 공장에 나간 누이동생들의 희생 덕분에 공부도 하고 덕분에 성공해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지난 세대의 아저씨들은 쓸데없이 입을 놀리며 '이대남'들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붓는다. "쪼잔한 새X들, 너네들이 좀 참아. 남자가 돼가지고 왜 그러냐."


 느 한쪽 편을 들지 못하는 나는 여성들에게는 별수 없는 '한남'으로, 남성들에게는 '남페미'라며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편이 아니면 남의 편이고, 그런 남의 편은 모조리 나쁜 놈이고 죽일 놈이 되는 세상. 모두가 편을 가르고 욕하며 싸운다.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에 부먹이냐 찍먹이냐, 민트 초코를 좋아하는 민초파냐 싫어하는 반민초냐, 대통령에 대해 대깨문이냐 반문이냐 따위 별의별 것로도 편 가르기를 하는 요즈음. 적인 대화와 이해보다는 우리편이 아닌 이들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과 끝 모를 혐오가 만연하다.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한참이나 뒷걸음질 친 것처럼 보이니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나마 간신히 바라는 건 이런 혐오와 폭력이 그저 온라인상의 일부 지질한 이들의 짓거리였으면 하는 것. 안산 선수는 이런 말 같잖은 논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나갔으면 한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보니 실은 바포레토의 여성 선원은 팔뚝이 굵고  잘했다. 정류장에 내릴 때 굳이 발밑을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일을 하는 데 있어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합한 능력을 갖췄느냐 그러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2. 연주자 마르코 옹(翁)의 음악과 인생사

산 마르코 광장의 카페 플로리안 앞에서 연주하던 악단 어르신들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밤은 노랗게 반짝거리는 가로등 불빛과 함께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 차 있었다. 웬만한 카페며 레스토랑 앞에서 전속 악단들이 연주를 하고 있어서였다.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광장을 걷다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라는 '카페 플로리안' 앞에 자리를 잡았다. 곳은 유명세에 비해 손님이 별로 없어서 한산다. 반대편 카페에서는 최신 팝이나 귀에 익숙한 유명한 영화 음악 위주 레퍼토리로 연주를 하는데, 여기서는 꿋꿋이 전통의 클래식 음악들만 들려주고 있어서 그런지 저쪽보다 테이블이 많이 비어 있는 듯. 전통과 역사가 좋은 벌이로까지 절로 이어지진 않는 모양이다.


 플로리안 악단의 리더는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 혹은 할아버지, 사이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센터 자리를 차지한 채 단원들에게 이런저런 손짓을 하고,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하고, 곡이 끝날 때마다 한 손을 들어 흔드는 멋진 제스처를 보여주는 모습이 누가 봐도 리더가 분명했다.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제멋대로 그에게 이름을 붙다. 산 마르코 광장이니까 성함 '마르코' 어르신으로. 성은 모르겠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붙인 이름인데 굳이 성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나. 음악을 들으면서 마르코 옹의 인생사를 역시나 제멋대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 베네치아에서 촉망받던 바이올린 영재였다. 그의 부모님은 고민했다. 우리 마르코는 베네치아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어. 잘 돼서 나중에는 빈에 가야 할 텐데. 그럼 일단 로마에서 교육을 받도록 해야겠다. 한국에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이탈리아에선 역시 로마로 가야 했던 거. 아들을 로마로 떠나보내던 날, 마르코의 가게에는 "축 ㅡ 베네치아의 음악 신동 마르코, 로마 입성 ㅡ 하."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한국이나 이탈리아나 동네방네에 잘난 자식 자랑하는 건 다들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린 마르코는 큰 충격을 받게 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수두룩했던 것. 게다가 다들 자기보다 나이도 훨씬 더 어렸다. 파스타 포크질도 제대로 못하는 코찔찔이들이 바이올린 현은 귀신같은 솜씨로 눌러댄다. 마르코는 자못 심각해졌다. 이래서는 빈은 고사하고 로마에서도 연주자로 자리잡기가 어렵겠는데. 그래서 그는 하루에 세 시간씩만 자고 길거리 조각 피자로 끼니를 때워가며 하루 온종일 미친 듯이 연습했지만, 도무지 로마 녀석들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재능의 부족을 한탄하던 중 마침 고향 베네치아에서 걸려온 뜻밖의 전화 한 통. 요즘 관광객들이 줄어 장사가 안 되는 탓에 생활비 보내주기가 어렵구나. 미안하다 아들아.


 실의에 빠진 나머지 매일같이 와인에 절어 살던 그는 어느 날 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마는데... 비극적이게도 연주자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손을 다치고 말았다. 치료가 끝났음에도 손끝의 감각은 예전같지 않았다. 프로 연주자의 삶은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 마르코는 카페 악단 연주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매일 밤, 카페가 문을 닫을 무렵이면 종종 빈 쪽을 바라보며 그는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고 다. 그때로부터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그는 어느덧 중년이 되어 카페 플로리안의 악단 리더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그의 얼굴을 보며 혼자서 쓸데없는 상념이어갔다. 어중간한 재능은 인간에게 축복이 아니라 비극일 수 있다고. 아예 아무런 재능이 없었으면 이런 세계에 처음부터 발을 내딛지 않았을 게고, 그 때문에 고통받는 삶을 살지도 않았을 텐데.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몰고 노래를 부르며 퇴근 후엔 친구들과 올리브를 안주 삼아 맥주를 한 잔 하며 별다른 고민 없이 하루하루 즐거이 마칠 수도 있었을 텐데.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재능이라는 축복을 받은 부럽고도 질투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삼국지>의 주유라도 된 듯,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라도 된 듯 괜히 가슴이 저릿해졌다. "아아, 하늘은 왜 주유를 낳고 제갈량을 또 낳은 것입니까", "아아, 욕망을 갖게 하셨으면 모차르트 같은 재능도 주셨어야지."


 무슨 B급 소설 냄새가 나는 말 같잖은 이야기 그만두라는 아내의 타박을 듣고서야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그만 접었다. 내가 감히 뭐라고,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럼, 안되고 말고. 마르코 옹 알고 보니 베네치아 유지데 취미생활로 자기 소유의 카페에서 심심풀이로 연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연주가 끝나면 고급 요트를 타고서 크고 화려한 대궐같은 저택으로 귀가할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미 세계적인 음악가로 명성을 떨친 후 말년의 미 삼아 고향의 카페에서 밤마다 연주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단지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베네치아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67월, 베네치아에서)

베네치아 기차역을 나오자마자 마주하는 풍경


곤돌라는 뱃삯이 너무 비싸다


바다니까 해산물 튀김 정도는 먹어줘야지


알록달록한 부라노섬


베네치아의 낭만적인 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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