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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Oct 30. 2021

여기가 동물의 왕국입니까

피렌체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6년 7월)

밤의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 본 피렌체 시가지




 피렌체는 야경이 근사하단다. 그래서 이곳의 밤은 시가지내려다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보내야 한다고 들었다.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아내와 나도 역시 노을이 질 무렵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 앞에서 13번 버스를 타고 언덕으로 향했다. 목적지인 미켈란젤로 광장까지는 20여분 정도 달려서 갈 수 있었다. 정류장에 도착해서 조금 걸어 올라가자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멀리 대성당인 두오모를 비롯 반짝거리는 시내 야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과연 밤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기대한 바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했다. 다들 그렇다고 하는 덴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낮에 올랐던 그 유명한 피렌체 두오모의 돔 꼭대기를 밤에 먼 곳에서 바라보니 느낌이 달랐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돔을 내려다보기 위해 실로 어마어마한 고생을 했다. 피렌체를 상징하는 붉은색 돔, 이탈리아어로 쿠폴라, 를 보려면 맞은편에 우뚝 솟아있는 조토의 종탑 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유럽의 여느 첨탑이나 고성들과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따윈 없었다. 여행의 필수품인 건강한 다리를 구비하고서 비좁고 구불구불한 계단을 하염없이 올라갔다.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이 정도면 꽤나 걸었다 싶었는데 아직도 더 걸어야 했다. 끝이 보이질 않았다. 올라가는 도중에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이가 있으면 일순 당황해서 절로 표정이 굳어졌지만 얼른 웃는 얼굴로 바꿔 익스큐즈 미, 혹은 괜히 이탈리아어 한 마디 해 본답시고 뻬르멧소,라고 외치며 몸을 살짝 비틀었다. 통로가 너무 좁아서 어깨를 펴고 걸으면 두 사람이 통과할 수 없었다. 이런 건 응당 갖야 할 글로벌 매너. 그런데 청춘 남녀라면 스쳐 지나가다가 서로 정분 나겠다. 너무 가까이 붙게 돼서. 물론, 나는 유부남이라서 해당 사항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첨밀밀>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피렌체에 들르면 으레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웬 홍콩영화를 떠올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저녁. 좁은 집 안에서 여명과 장만옥이 시간을 보다. 이제 밤이 늦어 장만옥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외투를 주섬주섬 걸친다. 하지만 그날따라 왠지 잘 잠기지 않는 장만옥의 외투. 단추가 말썽이다. 여명이 도와서 단추를 채워 주려는데 이게 또 잘 안 된다. 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주려 단추에게 의지가 생겨 애썼던 걸까. 어찌어찌해서 겨우 외투를 여미는 중에 마침 장만옥의 앞머리가 흘러내려 눈을 가린다. 이걸 여명이 손으로 넘겨주고, 그러다가 드러난 눈이 마주치게 되고, 둘 사이에선 묘한 기류가 흐른다. 그 뒤로는 미성년자 관람불가라 이하 생략. 무척 낭만적인 장면이었는데 나는 그 순간 '홍콩의 주택난이 참 문제구나.'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고작 두 명이 서 있기에도 현관이 너무 좁잖아. 비좁으니 저런 사단이 벌어지지. 저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지. 홍콩 정부는 대체 뭘 하는 건가.


 비단 홍콩뿐은 아니다. 한국에도 소위 '지.옥.고.'라는 말이 있다. 청년들이 집을 구매할 여력이 없으니 지하, 옥탑방, 고시원 방을 전전하고 있다는 현실을 표현하는 단어다. 도대체 서울의 집값은 왜 이렇게 비싼 걸까. 인구절벽도 현실로 다가왔는데 수요 감소는 아랑곳없이 거품이 계속해서 부풀어 오르는 중인 서울 아파트 가격은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 폭탄 같다. 아니, 실수요는 항상 존재하는데 공급이 모자란 게 문제일까. 여하튼 다들 아파트값이라는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나 역시 빠지면 섭섭할세라 그 틈바구니에 껴 있다. 예전에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본 적 있다. 매주 술을 마시던 어떤 사람에게 친구 한 명이 충고한다. "너 매주 마시는 술값만 아껴도 나중에 집을 한 채 사겠다."라고. 그래서 그 사람은 술값을 아껴서 결국 집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술을 끊은 지 2,000년이 지나서. 그 후로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 아마 3,000년 정도는 지나야 서울의 아파트를 살 수 있을 게다.


 낮에 고생했던 기억과 우울한 사회 문제 고민은 그만 여기까지.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 들어 미켈란젤로 언덕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발길이 닿은 어느 곳에서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한 채 키스를 하는 젊은 커플을 마주했다. 그들 옆에는 반쯤 비워진 와인병과 쿠폴라를 닮은 둥근 와인잔이 놓여 있었다. 이<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세계테마기행>에서나 보던 장면인데. 실제로 목격하니 기시감이 들면서도 낯설었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키스를 하는 이국의 청춘들이라니. 그들과 키스의 배경을 주제로 한 '로맨틱 대결'을 벌인다면 완패하겠다. 아내와의 지난 키스를 떠올려봤다. 자주 가서 놀았던 이태원에서 아내가 살던 보광동으로 걸어가는 길, 대사관 거리 옆에 붙어있는 어느 낡은 아파트에는 놀이터가 있었다. 사람이 지나가지 않는 어두운 밤, 놀이터 벤치 위에 앉아 아내와 꼬옥 껴안거나 입맞춤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피렌체 야경과 으슥한 놀이터의 대결이다. 이 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일 수밖에. 아아, 분하다. 이름 모를 상대는 싸울 생각조차 없는데 나 혼자 괜히 의문의 패배를 당하고 분했다.


 알 수 없는 열패감에 젖어있는 중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유명 관광지에 들를 때마다 으레 소음 공해를 유발하는 '그 나라' 사람들이겠거니, 했는데 다 들어보니 한국말이었다.

 "둘이서 오셨어요?"

 "......"

 "같이 놀아요. 와인 한 잔 하실래요. 저희가 쏠게요."

 "......"

 "저희 이상한 사람들 아니에요. 이제 어디로 가세요. 아, 잠깐만요."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대사들이었다. 피렌체의 야경은 뒷전이고 여기저기서 '헌팅의 장'이 펼쳐져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지금 피렌체에 있는 건지 홍대의 헌팅 포차 사거리에 있는 건지 순간 구분이 안 다. 당신들이 짐승도 아니고 여기가 동물의 왕국도 아닐진대 대체 왜들 저. 문득 홍상수의 영화가 생각났다. 내가 관람했던 그의 모든 영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서울이 아닌 어느 곳(간혹 서울에서도)에서 한다. 어떻게든 '그걸'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든 한 번 해 보려는 수컷의 지질한 본능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그려낼 수가 또 없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 현실은 현실. 영화의 남자들과는 달리 피렌체의 남자들은 결국 실패했다. 고국의 남자들에게 시달리던 여자 둘은 옅은 웃음을 짓고 손사레를 치며 바삐 자리를 떠났다. 남자들은 아쉬워하더니 금세 다른 여자들을 찾아 달려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내가 부끄러워졌다.


 "쟤네들 과연 늘 안에 성공할까? 굉장히 적극적이네."

 궁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아내에게 물었다.

 "글쎄, 안 될 것 같은데."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여자들도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이던데. 웃는 얼굴이잖아."

 "아니지. 단호하게 거했다가 쌍욕을 듣거나 험한 짓을 당할 수도 있어. 적당히 웃어주면서 피해야지."

 "아아, 그럴 수도 있구나."

 거리의 즉석 만남을 시도해 본 적도 당해 본 적도 없으며, 여자도 아닌 남자인 나로서는 모르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어떻게 이렇게나 잘 알. 유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나?"

 푸훗. 아내는 가볍게 웃고는 뻐기는 듯한 미소를 슬몃 지으며 대답했다.

 "나야 이태원에서 항상 놀았으니까 그런 건 잘 알고 있지."

 나 혼자 또다시 의문의 패배를 당했다. 아아, 하다. 피렌체의 낭만적인 야경을 눈앞에 두고 잠깐 사이에 두 번이나 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맨틱하거나 짐승 같거나, 둘 중에 하나의 길이라도 택해서 걸어 볼 걸. 이도 저도 아니면 결국 질 수밖에 없는지라 지난 시간을 후회하게 된다.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야심한 밤 홍대 뒷골목 같은 동물의 왕국에서 벗어나 다시 여행지 피렌체의 낭만에 젖어 들 시간이다.



 피렌체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6년 7월, 피렌체에서)

피렌체 중앙역에 도착


조토의 종탑, 어마어마한 계단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그 유명한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


어느 노천 카페에서 한가로이 커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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