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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Oct 17. 2021

지옥의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건

벳푸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8년 3월)

벳푸 가마도 지옥 온천의 마스코트, 시뻘건 도깨비




 일본 불매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 벳푸로 온천 여행을 떠났다. 겨우내 얼었던 몸과 마음을 뜨끈한 온천물에 녹이며 쉬게끔 해 주고 싶었다. 기왕 쉴 거 제대로 쉬어보자는 생각에 제법 값비싼 료칸도 예약했다. 매일 저녁으로 근사한 가이세키 코스 요리가 나오는 곳이었다. 그것도 따로 식당으로 갈 필요 없이 방으로 직접 가져다주는 걸로. 여행이 아니고서야 내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 보겠나. 그럼에도 결제 버튼을 클릭할 땐 아주 잠깐이지만 손가락이 머뭇거려졌다. 이틀밤치곤 과하게 비싸긴 했다.


 후쿠오카에 도착. 여기서부터 렌터카를 운전해서 일본 제일의 온천 도시로 들어섰다. 른쪽 좌석에서 운전하는 게 어색했지만 다행히도 별일 없이 목적지까지 왔다. 벳푸에 들어서자마자 과연 온천으로 유명한 곳답게 여기저기서 하얀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게 보다. 열어둔 차창 사이로 코를 킁킁거리게 하는 쿰쿰한 유황 냄새도 흘러 들어다. 언덕이고 평지고간에 땅 속에서 스멀스멀 연기와 내음이 올라온다. 난생처음 접하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어두운 밤중에 나와서 보니까 으스스하기도 다. 마치 지옥의 갈라진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연무 같달까. 희끄무레한 연기 사이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한 해 전에 들렀던 교토의 여우 신사에서도 그랬다. 어둠이 짙은 때에 들렀는데, 시뻘겋게 칠해진 나무기둥 사이로 정말 꼬리 여럿 달린 여우라도 한 마리 불쑥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일본의 밤은 귀(鬼)기로운 느낌이 든다. 이 동네에 요괴나 도깨비 등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을 수밖에 없겠구나 다.


 왠지 으스스해진 채로 벳푸의 밤거리를 걷다 보니 공포만화 거장 이토 준지의 단편 <지옥탕>이 떠올랐다.


 온천에 미친 남자가 어느 날 멀쩡한 자기 집 마루를 파고 들어다. 여기서 온천수가 샘솟을 거라는 얘길 하면서.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온천은커녕 구덩이만 점점 더 깊어져 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말리다 못해 지쳐버린 아내와 딸 집을 떠다. 집을 나온 후 장성한 딸은 남자 친구에게 자신의 미쳐버린 아버지 이야기를 다. 남자 친구는 그녀가 털어놓는 십수 년 전 아버지의 온천 이야기에 대해 이상하게도 흥미를 느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에 문득 온천 생각이 나서 그곳으로 가 본다. 그곳엔 정말 온천이 딸린 여관이 하나 서 있다. 땅을 파헤치던 전 여친의 아버님이 결국 성공 걸까. 남자는 옷을 갈아입고 온천 탕에 들어갔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다. 목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 사람들이 아니라 기괴한 모습을 한 이들이 탕 안에 득시글거리고 있는 것. 땅 속 깊은 구멍에서 지옥의 괴물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목욕을 마친 괴물들이 벌이는 피의 연회를 지켜보던 남자는 무서움에 떨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깨어나 보니 온천은 온데간데없고 웬 폐가에 홀로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다. 귀신에 홀렸던 걸까. 폐가 가운데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덩그러니 파여 있다. 기분 나쁜 연기가 흘러나오고 때때론 기괴한 소리가 새어 나오는 깊은 구멍이.


 이토 준지뿐만 아니라 무서운 이야기나 만화, 영화 등을 무척 좋아다. 어렸을 적엔 미드 <엑스 파일>이나 심은하가 출연한 공포물 <M>, 그리고 <토요 미스테리 극장> 같은 걸 보느라고 붙박이장처럼 밤새 TV 앞을 떠나지 못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공포 게시판 베스트 글 따위를 즐겨 읽었다. 휴가를 나온 군인 친구들에게 가장 궁금해했던 건 X 같은 선임이나 고된 훈련담 따위가 아니라 부대마다 전해 내려오기 마련인 귀신 이야기였다. 요즘에는 <심야괴담회>라는 프로그램도 흥미롭게 보고 있다. 언제부터 이런 걸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타고난 둔감한 성격 때문에 딱히 겁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아니다. 어렸을 땐 겁이 많았다. 나이가 들다 보니 사람이 무뎌진 것. 무서운 것도,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몇 번 겪다 보면 금세 심상해졌다. 아내는 이런 나를 보고 가끔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단다. 어떨 땐 네가 감정이 너무 희박해서 사이코패스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한다. 세상에, 사이코패스라니, 대관절 그게 남편에게 할 소린가.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공포에 떨던 때가 있기는 했다. 가장 기억에 남은 때는 바야흐로 이십 대 초반, 구청에서 공익 근무를 하던 무렵이었다. 당시에 내가 맡은 일은 구청 지하실의 체력단련실 관리였다. 딱히 어려운 건 없었지만 제일 먼저 도착해서 문을 열고 청소를 해야 했기에 매일같이 새벽 5시에 출근길에 나서야 했다. 2년 동안 주말 빼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출근을 하기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래봤자 현역으로 끌려간 친구들에 비하면 이런 건 고생도 아니긴 했지만. 새벽에 출근하지만 덕분에 점심 때 즈음 퇴근한다는 말을 털어놓자마자 현역 친구들은 욕설 반 부러움 반을 섞어 격한 반응을 보였더랬다. 너 XX가 헬스장에서 빈둥거릴 때 나는 XX, X뺑이 치면서 뒈질 것 같은데, 너 진짜 이 XXX.


 매일같이 아직 동이 트지 않아 깜깜한 가운데 버스 정류장에 첫 차를 기다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적막한 새벽. 아무도 다니지 않 그 시간대에도 종종 누군가 나타날 때가 있었다. 한참이나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이면 저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귀신인지 구분이 안 됐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흐릿했던 형상이 또렷해지고 어느샌가 다 와서 옆을 지나갈 때. 보지 않는 척하면서 실은 온 신경은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먹을 불끈 쥐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저 사람이 날 해치지는 않을까, 뭐하는 사람이길래 이 시간에 여길 지나가고 있는 거지, 정상인 사람은 맞는 걸까, 갑자기 품에서 칼 꺼내 일면식도 없는 나를 찌르라도 하면 어떡하지, 빨리 좀 지나가라.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잖아도 뉴스에서 '묻지 마 살인' 사건으로 한창 시끄러웠을 때다(그때로부터 십수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던 그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새벽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 걸어갔다. 왜 그런 사람들은 꼭 어두운 색의 점퍼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손은 품 속에 혹은 주머니에 넣은 채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이, 걸음은 누군가에게 쫓기듯 긴박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싸움은 역시 선빵필승. 그날도 여차하면 주먹을 날주고 빨리 도망가려고 긴장하 있던 참이었다. 여느 때처럼 종종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오던 그 사람. 고개를 슬쩍 돌리는가 싶더니 처음으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으악! 깜짝이야. 여기에 왜 사람이 있어."

 며칠이나 이곳을 지나쳤음에도 내가 여기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혼자서 야단법석을 떨었던 게 머쓱했던지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속으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게다. 쟤는 새벽 댓바람부터 왜 혼자서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 있지,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애 아니야, 혹시 나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지, 품 속에 저거 몽키스패너 아냐, 이제부턴 조금 멀리 피해서 걸어가야겠다. 그래서일까. 다음 날부터는 왠지 내가 있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걷는 듯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신도 나와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었군요. 다소 억울하기도 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하기에는 나 역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서울 수도 있게, 검은 패딩에 캡 모자를 눌러쓰고 양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정류장 벤치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공포란 괴로운 일이 닥쳤을 때, 혹은 닥칠까 봐 느끼는 두려운 감정을 의미한다. 그때의 나처럼,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 겁을 먹는 건 자신의 생존과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지의 존재가 상냥하기만 바랄 순 없으니까. 혹시라도 나를 해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낯선 이라 하더라도 나와 별다를 바 없는 보통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공포심은 한여름 볕의 아이스크림처럼 금세 녹아 없어졌다. 나의 신변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알게 돼서였다. 동물원 사파리에서 맹수를 구경할 때와 마찬가지다. 드넓은 초원에 맨몸으로 서 있을 때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떨겠지만, 튼튼한 철창살이 막아주니 호랑이며 사자 따위가 하나도 두렵지 않은 게다. 세상만사 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그때부터 내가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이른 새벽 버스 정류장에 홀로 앉아있던, 자신을 해할 수도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로서.


 두려움을 털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첫 차에 올라탔다. 새벽의 버스 타게 되면 놀란다. 수십 번을 탔음에도 탈 때마다 매번 놀라웠다.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일터로 떠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다. 놀람과 함께 부끄러움도 찾아왔다. 대학생일 때 첫 차는 으레, 밤새도록 술 마시고 놀다가 인사불성인 채로 타는 것에 불과했는데. 철없던 나와는 달리 삶을 치열하게 사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들처럼 열심히 살 수 있을까. 밥벌이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무얼 하면서 살게 될까.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시험에 떨어지면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학점과 토익과 인턴 같은 스펙은 언제 또 쌓나. 홀가분했던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사라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세 새로운 두려움의 싹이 틔었다. 그러니까 무서운 건 귀신이나 도깨비 따위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이었고,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도무지 앞길을 알 수 없던 진로 문제다.


 벳푸의 가마도지코쿠, 우리말로 가마솥 지옥 온천의 입구에 서 있는 도깨비를 보면서 예전 일을 떠올려봤다. 그때처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도깨비고 지옥이고 그까이거 실제로 마주칠 일도 없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나. 당장 눈 앞의 현실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그땐 취업이 고민이었고 지금은 육아와 재테크가 걱정이다. 나이가 더 들면 노후 생활과 건강에 대해 염려하겠지. 그러고 보면 사람은 살면서 두려워하는 게 늘 몇 가지씩은 있나 보다. 나 역시 겁이 없다지만 실은 이런저런 현실의 문제들에 시름하고 있으니, 아내가 우려하는 것처럼 아주 이상한 사람(사이코패스라니!)은 아니다.


 벳푸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8년 3월, 벳푸에서)

벳푸의 나름 고급 료칸에서. 매일 저녁마다 화려한 가이세키에 감탄했다


노천탕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뜨끈하게 온천욕


온천에서는 계란에 사이다


땅 속 여기저기서 괴기스러운 연기가 폴폴 피어오른다


그나저나 반주로 곁들였던 매실 사케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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