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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Sep 17. 2021

채찍질... 해야 합니까

산토리니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8년 9월)

등에 사람을 태운 채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던 산토리니 당나귀들




 저 당나귀들, 너무 불쌍하다.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절로 튀어나다. 그리스 산토리니 여행  그곳의 명물이라 불리는 당나귀들 마주했을 때였다. 들과 처음으로 조우한 이후부터 내내 불편했다. 여행지의 재미난 볼거리라는 생각보다는, 안쓰럽다는 감정밀물 썰물처럼 계속해서 겨났다 사라졌또 생겨났다 또 사라졌다. 며칠 동안 수도 없이 길거의 당나귀들과 만남을 졌다. 귀여운 당나귀 그림이 그려진 동키 맥주도 마다. 온통 하양과 파랑으로만 가득한 근사한 풍경에 당나귀 따위는 잊고 감탄를 내뱉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편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퇴근길 직장인처럼 터벅터벅 겁고 둔탁한 발굽 소리, 툭 건들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던 젖은 눈망울, 태운 사람과 싣고 있는 짐에 비 야위어 보이는 몸뚱아리. 게다가 힘이 부치는지 울음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 하는 당나귀였다.  못하는 짐승의 무거운 의 공백은 목에 매어 둔 눈치 없는 종소리가 경박하게 메웠다. 잠자리에 들 때도 귓가에 딸랑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눈을 감으면 라라라라 라라라라- 포카리스웨트 음악을 배경으로 청량한 산토리니 풍경이 떠오르다가도 어째 금세 사위가 어두워지며 불쌍한 짐꾼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맥주 따위가 아니라 도수가 40도나 되는 독한 그리스 술 우조(Ouzo)를 몇 잔 들이켜고 올 걸 그랬다. 아마도 취기 때문에 금방 곯아떨어졌을 텐데.


 다행히도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건 나뿐만은 아니다. 전 세계의 동물보호 단체들도 산토리니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당나귀에게 과도하게 무거운 관광객을 태우는 것이 ‘동물권 침해’라고 비판해 왔다고 한다. 스페인의 투우만큼이나 잔인한 짓이라고. 이를 의식했는지 몇 년 전에 그리스 정부는 '당나귀 보호 지침'을 발표해서 100kg이 넘는 사람이나 당나귀 체중의 1/5을 넘는 짐을 싣지 못하도록 . 예전에는 채찍질을 당해가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을 당나귀들, 이제는 삶의 질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려나. 혹은 어느 나라에서처럼 오로지 효율성만을 외치면서 지침이나 규정 따위 무시하고, 갑질을 하며 려대는 인간들 때문에 여전히 혹사당하고 있을까.


 채찍질당하는 당나귀를 생각하니 문득 나의 성실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서 게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열심히 살아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매번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예예."하고 대답하곤 한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는 언제나 열심치가 않았나 다. 유독 아침잠이 많고 뭐든 최대한 나중으로 미루려는 습관 있으니 부모 된 입장에서 그러실 수도 있겠다 싶다. 아들 걱정 잔소리를 하실 수밖에. 아버지뿐이랴. 회사의 K부장 나를 보면 입버릇처럼 말다. "너는 인마, 좀 더 열심히 하면 더 잘할 것 같은데 왜 안 하냐." 그때마다 역시나 고개를 꾸벅거리며 "예예."하고 대답하곤 한다. 죄송해 마지않아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새벽까지 원치 않는 회식을 하면서 원치 않는 술을 마셔댔으니 사무실에서 조금 졸 수도 있지, 지는 그동안 뭐 얼마나 열심히 일했다고.


 아주 예전에, 신입의 때를 벗지 못했을 무렵에는, 눈을 억지로 반짝거리면서 "뼈가 부서져라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상사들이 좋아하는 대답을 했다. 어느덧 10년 넘게 묵은 직장인이 된 지금에는 그런 말을 들으면, 저 반 또 저러네, 라는 대사가 얼굴에 유성 매직으로 진하게 써져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심상하게 대답한다. 속으로도 생각한다. '열심히 하면 뭐가 남는데요?' 채찍질당하는 당나귀처럼 일을 열심히 하면 빨리 승진하 월급이 늘어나나. 렇게 차장, 부장, 본부장, 운 좋게 임원까지 라가더라도 앞의 세대처럼 평생 직장이라는 건 없으니 퇴직할 날만 빨라지는 셈이다. 안 쓰고 안 먹고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봤자 십 수억 원이나 하는 서울의 브랜드 아파트 하나도 살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러니 다들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코인이니 하는 데 열을 올리지 누가 일 따위를 열심히 하나. '직장생활에서의 열심히'의 종착역을 일찌감치 파악한 요즈음의 눈치 빠른 젊은이들은 퇴사와 부업 찾기에 재빠르다.


 사람을 살리거나 가르치거나, 혹은 죽이거나(?) 하는 전문직이 아닌 이상 직장에서 보람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니 자아실현이니 하는 게 다 웬말이랴. 직장에서의 삶이 내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직장 밖에서 재미를 찾으면서 내 삶의 무미건조함을 비우고 유의미함을 채워야 한다. 이를 위해 여력이 필요하다. 퇴근 시각에 회사 정문을 나오면서 제2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남는 에너지가 있어야지. 악기를 배우든 요리를 하든 독서 모임을 갖든 취미 생활을 한다. 남들보다 나은 재주가 있다면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운전을 하든 해서 부업으로 월급 외의 부가 수입을 창출한다. 하다 못해 퇴근 후 연애라도 하는 게 이 각박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남는 거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직장에서 일만 열심히 하는 당나귀가 될 수 없다. 90분 풀타임을 뛰지 않고 적당히 60분 정도만 뛰자. 힘을 아껴둬야 고삐가 풀렸을 때 나만의 안식처로 달려 나갈 수 있으니.


 아니,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 내가 게으름에 천착했던 이유는 어쩌면, 실패했을 때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좋지 않은 결과를 마주했을 때 "제가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공했을 거에요."  핑계를 대.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해 버린다면 자존감 은 내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중한 나 자신을 다치지 않기 위해 '실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 알리바이를 그동안 무던히도 만들어왔다. 수능 전날에는 보란 듯이 컴퓨터를 켜서 피파온라인 몇 판을 했고, 고시 2차 시험을 한 달 앞두고선 갑작스레 개팅 후 연애를 시작했으며, 원하는 에 올인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기보다는 지금의 직장을 다니면서 직에 성공하려고 비벼댔다.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그건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유해한 게임을 했다, 철없이 사랑에 눈이 멀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핑계를 댈 수 있겠거니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위한 변명을 좀 하자면, 나름 좋은 대학 나와서 번듯한 직장도 있고 차도 사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서울에 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으니, 이 정도면 열심히 산 거 아닐까. 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일종의 과제처럼 부여됐던 '남들 다 하니까 도 해야만 하는' 들을 웬만큼 달성했으 이제 그만 열심이어 되겠다. 그런 게으르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다가 거리의 당나귀와 또다시 마주쳤다. 녀석의 눈을 보며 마음 속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얘야. 짐승인 너는 열심히 살아라. 인간인 나는 적당히 살련다. 그런데 '미안하다'가 그리스말로 뭐였더라. '고맙다'는 말은 '에프가리스토(''에 악센트를 줘야 한다)'였는데. 그리스 사람들한테 땡큐 대신에 에프가리스토라고 말하면 되게 좋아라 하던 기억이 난다. 너도나도 대책 없는 낙관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리스인 조르바가 되었더랬다. 당나귀 이야기 하다가 또다시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니, 결국 나는 당나귀라는 짐승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기는 했던 걸까 싶다.


 산토리니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8년 9월, 산토리니에서)

산토리니 이아 마을의 하루


거리 곳곳에 고양이며 강아지들이 한가롭게


산토 와이너리에서 달콤한 빈센토 와인 한 잔, 아니, 여러 잔


산토리니 피라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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