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Aug 16. 2021

아버지의 취미생활

LA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8년 11월)

LA 레이커스 vs 유타 재즈. 홈팀인 레이커스가 이겨서 타코를 얻어먹었던 날




 LA에 여행 갔을 때 남는 시간을 만들어서 레이커스 농구 경기를 보러 갔다. 홈팀 LA 레이커스 대 어웨이팀 유타 재즈의 경기. 야구장에는 자주 찾아갔었지만 농구장에 간 건 난생처음이었는데 그걸 낯선 이국 땅에서 경험하게 됐다. 예전에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빠져있을 때 나도 언젠가는 조이(맷 르블랑)처럼 짜디 짠 미국 피자 한 조각 입에 물고서 뉴욕 닉스 경기를 봐야지, 하고 다짐했더랬다. 비록 닉스는 아니지만 레이커스 경기를 봤으니까 절반 정도는 목표를 이룬 셈이다.


 그나저나 농구라는 걸 TV 중계로나마 봤던 게 대체 언제였더라. 농구대잔치 시절 기아와 연세대 경기가 마지막이었던가. 그 시절 남자아이라면 나남없이 그러했듯, 소싯적에 만화 <슬램덩크>,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등번호 23번 마이클 조던에 열광했더랬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야구와 2002년 월드컵 때문이었는지 농구 따위엔 별 관심이 없었다.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 재즈는 칼 말론과 존 스탁턴 아닌가요."

 경기장으로 들어서며 철 지난 이야기를 농이랍시고 던졌다. 동행했던 L형은 원시인이라도 조우한 듯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게 무슨 MS 도스 쓰던 시절 이야기야?"

 왜 그러세요, 너무 거슬러 올라가셨네. 저는 그래도 윈도우 3.1 세대입니다.   


 그런 '농알못'이라서 기대하지 않았건만 경기는 생각 이상으로 볼 만했다. 속도감 넘치는 장면들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이쪽 골대에서 저쪽 골대까지  오고가걸 보느라고 고개를 계속 좌우로 돌려대느라 목과 어깨가 다. 슛과 리바운드 때마다 주먹이 절로 꽉 쥐어지고 손에는 땀이 흥건해졌다. 호쾌한 덩크슛이 터질 때마다 양 옆의 이름 모를 미국인들과 한 목소리로 "예아!"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쿼터 중간마다 쉬는 시간에도 치어리딩을 비롯한 이런저런 흥미로운 이벤트들 많아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왜 이런 공놀이에 다들 열광하는지 그제야 알게 됐다. 게다가 그날 경기를 이긴 덕분에 타코벨 쿠폰까지 한 장 얻어서 기분 좋게 경기장을 떠날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날 때 즈음이 되자 여기저기서 "위 워나 타코, 위 워나 타코!" 하고 외치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마침 레이커스와 타코벨의 콜라보 이벤트 기간이어서 승리 때마다 관중들에게 공짜 타코가 뿌려졌던 거였다.


 인생 첫 NBA 직관은 다 좋았는데 딱 하나 아쉬웠던 건 기대했던 '에이스' 르브론 제임스의 실망스러운 플레이였다. 친구 H가 모으고 있는 선수 카드 중에서 실력으로 치자면 탑에 꼽을 만한, 일명 킹이라 불리는 그 선수. 비단 H 뿐만은 아니었다. LA 시민들도 당시에 갓 이적해 온 킹 제임스에 대한 기대가 컸는지 도시 이곳저곳에서 그를 환영하는 광고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유어 마제스티, 우리 레이커스를 우승시켜 주십시오, 라는 바람들로 가득 차 있던 시기. 하지만 어째 그날은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영 눈에 띄지 않았다. 코트 위를 설렁설렁 걷듯이 뛰다가 대충 슛이나 몇 번 던지고. 급기야 마지막 쿼터에서는 교체돼 나가서 벤치에 앉아 쉬는 게 아닌가. 잔뜩 대했더니만 대체 이게 뭐야. 그런데 숙소로 돌아오면서 방금 끝난 경기의 스탯을 확인해보깜짝 놀랐다. 킹은 20점이 넘게 득점했다. 아무리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킹은 과연 킹이구나.


 요즘에는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를 꼽을 때 르브론 제임스냐, 마이클 조던이냐로 논쟁한다고 했다. 에이, 그래도 마이클 조던이 최고지. 정적인 부처에서의 '더 샷'. 그만한 선수가 또 어딨나. 축구도 근 10여년 간 메시와 호날두가 양분하는 시대라지만,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브라질의 호나우두가 최고의 선수로 자리 잡고 있다. 중앙선에서부터 상대편을 다 제끼고 '헛다리 드리블' 후 슛. 그만한 선수가 또 없다.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이 나를 단단히 붙들고서 놓아주질 않는다. 네가 틀렸다며  시대 선수들의 커리어와 스탯이라는 객관적인 지표를 아무리 들이밀어도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게다. 이렇듯 기억은 때론 현실을 압도한다.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내 인식 체계를 확장하기보단 그저 거부해 버리는 꼴. 이러다간 말머리에 항상 "나때는 말이야."를 일삼는 꼰대가 되기 십상이니 조심해야 한다.

  

 그나저나 킹 제임스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H는 이제 만으로 두 살을 넘긴 아들을 키우고 있는 선배 아빠이다. 아이가 태어난 해부터 취미 생활이랍시고 NBA나 MLB 선수 카드를 수집하는 중이다. 미국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 선수 카드와 기념품들까지 가리지 않고 모은다. 최동원이나 박찬호의 사인볼, 롯데 자이언츠의 1992년 마지막 우승의 주역 염종석과 같은 추억의 프로야구 선수 카드, 이대호의 사인 유니폼, '사인의 희소성' 때문에 귀하게 취급받는 이승엽의 사인볼 등등 컬렉션이 다양하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시작했다더니 이제는 가히 프로 수집가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왜 이리 열심히냐는 물음에 H는 이건 단순히 취미가 아니라 나름의 목적이 있는 행위라고 답했다. 나중에 자신의 아이가 아빠의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됐을 때 즈음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모은 거야, 아빠가 주는 선물이야."라며 물려주고 싶다면서. 잠깐, 이거 혹시 상속세를 피해 가려는 고도의 현물 물려주기인가. 실제로 몇몇 카드는 벌써 리셀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


 컬렉션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부러움은 커져갔다. 부러움, 혹은 질투 사이 어딘가의 감정 때문에 소리 없이 몸부림치는 나를 보면서 또 다른 친구 W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애 보느라 어디 나가질 못하니 집에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부러울 것 하나 없어."

 생각해보니 그렇다. 다들 아이 아빠가 되고 나서부터 친구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가끔 만나더라도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서둘러 귀가하는 모습만 보게 될 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이야. 만나기만 하면 기본 새벽 두세 시까지 달리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 추억이 되어 버렸고, 이제는 "짧고 굵게 딱 10시까지만 마시자."라며 귀가 시간을 정해놓은, 아무도 유리구두는 신지 않았지만, 마치 일찍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신데렐라 같은 모임뿐이다. 심지어 코로나 19가 한창이던 무렵엔 아예 모이지도 못했다. 일도 하고 육아도 해야 하고 바깥에 나갈 엄두도 못 내게 됐으니, 결국 집 안에서 인터넷 쇼핑몰 클릭질이하면서 이어갈 수 있는 취미 생활을 할 수밖에. 이렇게나마 내 삶을 지켜보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나의 아버지는 무슨 취미가 있었을까. 매일같이 일만 하시던 모습만 봐서 잘 모르겠다. 술 담배도, 등산이나 낚시, 혹은 바둑 같은 취미 따위에 빠져계신 걸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당신께선 지독하리만큼 성실하셨다. 쉬는 날엔 아내와 자식들과 늘 함께하셨으니 돌이켜보면 무척 가정적이기도 하셨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변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이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본다. 신생아를 키우는 젊은 아빠 엄마들은 새벽에 잠을 못 자 눈이 시뻘겋고, 조금 자란 아이들을 기르는 사람들은 쉬는 날마다 놀이동산이며 과학관이며 무슨무슨 체험 활동 따위를 하느라 바쁘고, 어느 정도 큰 아이들이 있는 학부형들은 학원 돌리기며 과외며 스펙 쌓기 등의 자녀 교육에 여념이 없고, 이제 다 키웠다 싶은 집에서는 자식의 취업과 결혼 같은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들 있다. 육아라는 게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부모 된 자의 삶에 감히 취미생활이란 게 끼어들 틈이 어딨겠나.


 아이를 키우다 보니 종종 아이에게 '나 자신의 삶'을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다. 아이를 낳기 전에도 걱정했다. 나는 아직까지 나를 더 사랑하고 싶은데, 나의 세계가 좁아지지 않았으면 하는데, 나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취미라는 게 있는데. 이런 속마음을 토로하니 주변 사람들이 다들 한 마디씩 참견했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나 자신에 대한 생각 따위 하나도 나지 않을 만큼 너무 좋다."

 "그동안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아이는 꼭 낳고 길러봐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 되는 거다."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이라는 게 있다. 나는 나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지, 누군가의 아빠라고 불리면서 살아가기는 싫다. 그래서 뭐가 됐든 취미생활 하나만큼은 꼭 붙들고 있어야겠다. 나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다. 출산 전의 어느 날에, 마치 '이 열사 힘차게 외칩니다!' 선언하듯 이런 대답을 하니 주변 사람들이 코웃음 쳤다. 헛된 꿈에 빠져있다고.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타입이라면서. 아이가 생기면 적어도 3년 정도는 내 삶이라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충고가 이어졌다.


 설마 했는데 육아를 하다 보니 정말, 할 수 있는 게 뭐가 없다. 아이가 얼른 자라서, 점점 그라들다 못해 라지고 만 나의 세계를 다시 되찾는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H 뿐 아니라 롤 모델로 삼을 만한 부모들이 몇 있다. 아이들이 깨기 전 새벽 시간에 일어나 영미 소설을 읽는 선배 Y, 아이를 재우고 야심한 시각주짓수를 하러 체육관 나가는 후배 J, 아이에게서 해방된 출퇴근 시간 전철에서 글을 쓰며 출간작가가 된 친구 S까지. 펜싱의 박상영 선수처럼 "할 수 있다!" 외치며 나 역시 예전의 삶을 회복하기 위한 다짐을 해 본다. 런데 나는 아버지가 되기 전에 무얼 좋아했더라. 내 취미라는 게 뭐였지. 어째 오래돼서 바래진 책 페이지의 글자처럼 기억이 흐릿하다. 농구는 좋아하지 않았던 게 확실하고. 야구를 좋아했었나, 축구를 더 좋아했었나. 한때 롯데 자이언츠 팬이기는 했던 것 같은데. 찾아올 나의 취미, 나의 세계라는 게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요즈음이다.


 그나저나 르브론 제임스는 마이클 조던을 뛰어넘어 역대 최고의 선수로 불릴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LA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8 11월, LA에서)

킹 르브론을 환영하는 광고들로 가득 찬 LA 스테이플스 센터 앞


야구장에나 있는 줄 알았던 응원봉을 NBA 경기장에서 보게 될 줄이야


라라랜드의 할리우드 거리에서


산타모니카 해변의 아이들


왠지 아련한 밤의 놀이공원, LA 디즈니랜드


이전 25화 금문교가 절반도 안 보이는데 출근은 무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