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나이키 신발이 벌써 두 개나 있다는 친구의 말
그간 격조했던 고향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장충동의 제법 유명한 족발집에서였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코로나 19 이후 처음으로 셋이서 모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마스크를 벗지 않고 살던 때라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친구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안부 인사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핏 봐도 맛있어 보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족발 대자가 나왔다.
드디어 마스크를 벗고 입을 열었다. 이거 완전 마기꾼이었네, 눈만 볼 때는 몰랐는데 입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네, 다들 그새 엄청 많이 늙었네, 같은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하루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입에서 가끔 발냄새가 난다는 말을 했다. 그럼 구내염이 생기면 오라메디를 발라야 하나, 무좀약을 발라야 하나. 이게 무슨 말 같잖은 말인가. 역시나 시답잖은 농담이었다.
친구들과 족발을 뜯고 맥주를 마시면서 계속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 지금 일어나는 중인 이야기, 훗날에 일어날 이야기들. 고등학생 때 2002년 월드컵이 열렸는데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영락없이 아재들이 돼서, 그래도 조규성보다는 안정환이 더 잘생겼다는 데 뜻을 모았다. 여느 때처럼 회사를 욕하고 집값과 대출금 상환과 금리 걱정을 했다. 아직 서너 살밖에 안 된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한 기대를 떠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대화의 주제가 운동으로 넘어갔다. 이제는 우리도 건강을 조심해야 할 나이니까. 몇 달 전에 H는 나이키 러닝 앱을 깔고 난 후 우리에게도 깔라고 했다. 친구를 맺더니만 하루가 멀다 하고 나와 K의 운동 기록을 체크해 댔다. 재미 반, 경쟁 반으로 나 역시 밤에 아이를 재우고 집 앞 홍제천에서 걷거나 뛰었다. 하루에 2~3Km씩,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씩 기록이 쌓이니 나름 보람찼다. H야, 나 요즘 열심히 달린다. 이것 보라는 듯 나는 엊그제 새로 산 검은색 러닝화를 신은 발을 번쩍 들었다.
“우와, 이 자슥. 나이키 신네. 니 억쑤로 부자네!”
“이기 머라카노. ㅋㅋㅋㅋ”
H는 내 신발을 보고서 호들갑을 떨었다. 나이키 신는다고 부자란다. 짭이 아니냐며 나이키 로고를 유심히 살피는 척하고, 이거 집어 당기면 뜯어지는 것 아니냐며 신발을 주물럭거렸다. 나는 비싼 신발 함부로 만지지 마라면서 발을 요리조리 피했다. 이런 시답잖은 짓을 하다 보니 마치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H가 말했다.
“우리 애도 나이키 운동화 두 개 있는데. 그거 본께네 좀 그렇더라. 내는 군대 제대하고 복학생 때 처음 나이키 신어 봤는데. 알바해서 돈 벌어갖꼬. 야는 무슨 복이 있어서 아직 세 돌도 안 된 놈이 나이키를 벌써 신는다이.“
“그러고 보니 내도 그렇다이. 나이키가 웬 말이고. 프로스펙스 아이믄 아식스 같은 거 신었는데. 시장 가서 컨버스 올스타 짝퉁 원스타 이런 거 사서 신기도 했제.“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고등학생 때까지 나이키 신발을 신어 본 적 없었다. 언제였더라.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면은 대학생 때 알바로 번 돈으로 가리봉동 아웃렛에 가서 50% 세일 중이던 나이키 코르테즈를 샀던 것. 신발 따위가 왜 이리 비싸냐며 투덜거렸고 그래도 애지중지하며 신고 다녔던 나의 모습이다. 나중에는 밑창이 뜯어져서 비가 오면 물이 샜는데 강력 본드로 몇 번이고 붙여가며 신고 다녔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카카오톡 기프티콘으로 검은색 아디다스 운동화를 선물 받았다. 아직 걸음마를 시작도 하기 전이었다. 걷고나서부터 아식스가 생겼고, 여름에는 크록스를 신었고, 한동안은 뉴발란스를 신고 뛰어다녔다. 나는 여태껏 뉴발란스를 신어 본 적 없다. PT를 자주 하는 IT 회사에 다녔으면 검은 목 폴라티에 청바지, 뉴발란스를 신었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이는 30개월이 지나자 키도 부쩍 크고 발도 커져서 새 운동화를 사 줬다. 이번에는 하얀색 아디다스였다. 돌이켜보니 단 한 번도 메이커 신발이 아닌 적 없다.
나도 그렇고 주변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어린 자식에게 웬만큼은 모두 사 주려고 한다. 당근마켓이나 주민센터 장난감 대여 센터들에서도 멀쩡한 헌것들을 구할 수 있지만 여력이 닿는 한 새것으로, 좋은 것으로. 아이를 둘 이상은 낳지 않으려 하는 요즈음엔 다들 그럴 게다. 하나뿐인 자식, 하나뿐인 손주, 하나뿐인 조카한테 벌려지는 지갑이 얼마나 많겠나. 그러니까 부모, 양가 조부모, 삼촌과 이모까지 한 아이에게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는 ‘에잇 포켓’이라는 말도 생겼을 터.
다만 아이가 풍요로움 속에서 물건의 소중함을 배우지 못할까 봐 걱정이다. 고장 나고 찢어지고 깨지면 쉬이 버리고 새 걸로 바꾸는 버릇이 들까 봐. 엊그제만 해도 그렇다. 누가 아들이 아니랄까 봐 자동차에 환장하는 아이는 본래 노란 스포츠카를 가장 애정했다. 그러다가 빨간 스포츠카가 생긴 뒤로는 노란 차는 찬밥 신세가 됐다. 하지만 불이 번쩍거리고 소리도 나는 까만 스포츠카가 들어오니 다시금 최애 장난감이 바뀌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차 타워 장난감을 줬을 때, 동기 M형에게서 받은 옥스포드 블록을 줬을 때엔 하루종일 갖고 놀더니만 며칠이 지나자 시들해졌다. 분명 처음 만난 날에는 밤이 늦었으니 자자고 해도 더 놀아야 한다며 울고불고 난리 치던 녀석이. 새로운 걸 마주하면 오래된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요즘 들어 하는 가장 큰 고민이다.
“우리 너무 시끄릅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이.“
잠자코 듣기만 하던 K가 말했다. 한참을 얘기하는 걸 듣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단다. 어째 우리가 신은 신발이며 입은 옷이며 들고 온 가방 따위를 흘겨보는 것 같다고. H와 나는 동시에 대답했다.
“어, 쪼매 부끄럽네.”
“그르게. 나이키 그기 뭐라고, 부끄럽그로.“
금세 얼굴이 홧홧해졌다. 쉴 새 없이 떠들던 입을 잠시 닫고 숨을 고른 뒤.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발을 슬그머니 테이블 밑으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