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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an 23. 2023

소독중독자 vs 코로나19

코로나19가 우루루루루 후닥딱 들이닥쳤던 날

 지난 3년여간, 그러니까 코로나 19가 발발한 이후부터, 아내에게 무던히도 짜증을 냈다. 아내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누가 보더라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때때로 내가 한숨을 섞어 “이 정도면 정말 중독이야 중독.”이라는 말을 할 만큼, 아내는 쓸고 닦고 씻고 소독액을 뿌리고 데 열과 성을 쏟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마트에는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생필품은 무조건 비대면 택배로 받는다. 마켓컬리, 쿠팡, 쓱 배송 같은 택배 박스가 도착했다는 심야의 알림이 뜬다. 우리 집이 횟집이 아닌데도 식탁 위에 커다란 하얀 비닐을 씌운다. 그런 다음 현관문 바깥에서 박스를 뜯는다. 외부 물건을 집 안에 일절 들여놓으면 안 된다고 해서다. 박스 안 물건을 하나씩 집어서 식탁 위에 깔아 둔 비닐 위에 둔다. 주문한 물품이 많아서 최소 서너 번은 왔다 갔다 해야 모두 나를 수 있다. 내가 문 밖과 식탁을 오가는 동안 아내는 물건 하나하나를 소독 티슈로 닦는다. 과일류는 티슈 대신 식초를 한 움큼 뿌린 물에 담근다. 정리가 끝나면 냉장고 손잡이며 식탁 위를 다시 한 번 닦는다. 바이러스가 묻어있을 수 있다 걱정하면서. 택배 정리가 끝나고 나면 나는 손을 박박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잠깐이지만 바깥공기를 쐬었으니 더러운 게 묻어왔을 수도 있다고 해서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현관에서부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카드캡터 체리가 변신하는 모습처럼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면서, 반짝이 가루 대신 분무기에서 뿌리는 소독액을 맞는다. 그런 다음 세탁기로 가서 조심스레 옷을 벗는다. 행여나 집 안 물건에 옷이 닿기라도 하면 아내는 기겁하며 그곳을 소독 티슈로 바삐 문지른다. 조심 좀 하라며 소리치는 아내에게 사과한 후 욕실에서 샤워를 한다. 어느 날엔 회사를 다녀와서, 아이와 산책하고 나서, 택배를 정리하고 나서, 더운 날씨에 땀이 흘러서 하루에 네 번이나 샤워를 한 적도 있다. 겨울에는 패딩이며 코트까지 죄다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렸다. 매일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길 수가 없어서였다. 옷은 세탁기의 물과 건조기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지기 일쑤였다. 이러다간 겨울 외투가 남아나지 않겠다 싶어서 육아휴직 기간이라 수입도 한 푼 없는 주제에 비싼 에어드레서를 사서 집에 들였다.


 퇴근 전에도 당연히 조심스레 행동한다. 회사에서는 식사 때 외에는 마스크를 한 순간도 벗지 않는다. 부서에 비치된 주전부리 따위는 행여나 손이 갈까 봐 쳐다보지도 않는다. 뭐라도 만졌으면 무조건 소독젤로 손을 닦는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무렵, 아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본 적 있다.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지 말고 도시락을 싸 가서 차에서 혼자 먹으면 어떻겠냐고. 나는 기겁하며 대꾸했다. “남편 사회생활 망칠 셈이야.”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칸막이가 설치된 구내식당에서만 밥을 먹기로 극적으로 합의했다. 어찌나 마스크를 꽁꽁 싸매고 다녔는지, 엊그제는 옆 부서 계약직 N으로부터 “차장님,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맨 얼굴을 보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지난달엔 부서 회식이라는 자리에 실로 오랜만에 참석했다. 가만히 날짜를 세어 보니 무려 2년 반만이었다.


 기실 아내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재작년 봄까지만 해도 아내는 임신부였고, 코로나가 험악한 기세로 퍼져나가던 시기엔 아이가 신생아였으니까. 그동안 조우한 바 없는 미지에의 공포는 우리를 위생에 대한 강박으로 내몰았다. 아내가 하루 종일 손 씻어라, 닦아라, 소독해라, 옷 갈아입어라, 하는 말을 해도 꾹 참고 따랐다. 육아휴직 때는 7개월 동안 가족 외의 사람을 만난 때는 딱 두 번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니 우리는 병마의 마수를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모두가 좀비로 변한 세상에서 홀로 인간으로 남은 윌 스미스처럼, 우리만은 미감염자로 남겠다고. 여태까지 한 번도 걸린 적 없는 후배 S와 함께 우린 어쩌면 ‘슈퍼 면역자’가 아닐까, 하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국과수 같은 데 끌려가서 해부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자며. 도원결의하듯 우리는 끝까지 걸리지 말자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던 일요일 오후였다. 오전에 아이와 함께 가벼운 나들이를 다녀오고, 역시나 깨끗하게 목욕을 시킨 뒤, 낮잠을 재웠다. 아이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보다 거의 한 시간 반을 더 자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오래 자네, 라는 생각을 할 때 즈음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로 달려가서 깨어난 아이를 안았더니 불덩이 같았다. 그 뜨거움은 아이를 울고 소리 지르게 했고, 나와 아내를 놀라게 했다. 허둥지둥 체온계를 꺼내 아이 귀에 넣어 삑, 하고 온도를 쟀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할 ‘39’라는 숫자가 떴다. 요즘 날이 추워져서 감기가 유행한다더니 불청객이 찾아왔구나. 오늘은 바깥나들이를 다녀오지 말 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아이 키우는 집이라면 으레 구비해 두는 빨간 해열제를 먹였다.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적셔 아이 몸을 닦아줬다. 울음도 그치고 어느 정도 괜찮아진 듯했다.


 밤이 되자 내려갔던 체온이 점점 더 오르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재우고 난 다음날 새벽. 우리는 잠 한 숨 못 자고 매시간마다 아이 귀에 체온계를 갖다 댔다. 열은 여전했다. 38도대로 떨어지는 듯하더니 39도, 40도까지 올랐다.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숫자였다. 주식과 아파트값이 이렇게 오르면 좋을 텐데,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아이는 울음도 나오지 않는지 축 늘어졌다. 이대로라면 큰일이 날 듯해서 119를 불렀다. 구급차가 금방 도착했다. 아이와 함께 차에 올라서려는데 보호자는 1인밖에 동승하지 못한단다. 아내와 아이를 집 근처 신촌 세브란스로 보내고 나는 차를 달려 뒤따랐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가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응급실 역시 보호자 1인밖에 못 들어간단다. 뭐 이런 법이 다 있나.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아내가 전화로 알려준 소식에 따르면, 아이는 해열제 주사를 맞고 금방 열이 떨어졌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혹시나 해서 코로나19 검사도 받았다.


 마침내 만난 나를 보자 생글생글 웃는 아이. 열이 내려서인지 활기를 되찾았다. 그동안 TV와 스티커북에서만 보던 삐뽀삐뽀 차를 타 봤다면서 신나 했다.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니 그제사 안심이 됐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꼬마버스 타요’ 노래를 들으면서 신나 했다. 씻고 밥을 먹고 약을 먹였다. 분명 달콤한 향이 나는 시럽인데도 약은 약인지라 아이는 입을 꾹 닫고 벌리지 않았다.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 "약 시러! 약 아니야! 약 가!" 30개월에 들어선 아이는 싫다, 아니다, 가 버려 같은 말을 할 줄 안다. 제 수준에서 아는 모든 부정사들을 총동원해서 약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수가 있나. 나는 아이의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붙잡고 아내는 아이의 입을 벌려 약을 욱여넣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동 학대처럼 보였겠다. 한바탕 난리 끝에 한숨 돌리고 나니 서대문구 보건소로부터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아이가 코로나19 양성이란다. 오늘 월요일부터 7일간 격리해야 한단다.


 그때부터였을까. 거짓말처럼 아이의 열이 또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여도 잠시뿐. 눌러 놓으면 튀어나오는 용수철처럼, 체온은 내렸다가 오르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약을 먹이고 몸을 닦아주고 아이가 해 달라는 건 다 해주며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뿐. 밤에는 상태가 나빠졌다. 어젯밤처럼 아이는 울 힘도 없는지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병원으로 가야겠어.” 아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119에 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늦은 밤, 게다가 코로나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은 없었다. 집 근처 병원 응급실에서도 지금 도착하면 서너 시간은 대기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답답한 마음에 연락해 본 서대문보건소에서도 병원 수배를 진행해 줬다. 처음에는 남양주에 있는 어느 병원을 안내했다. 죄송하다며 거절했다. 다음번에는 인천 검단의 어느 병원을 알려줬다. 거기도 너무 먼데요. 하지만 더 이상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강변북로를 달려 인천으로 향했다.


 검단의 병원은 24시간 내내 운영하고 코로나 환자를 위한 음압 병실도 구비한 곳이었다. 이번에도 보호자는 1인밖에 동행하지 못한다 해서 아내와 아이만 병실로 올라갔다. 나는 1층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집에서 해열제나 먹이는 것보다는 병원에 있는 게 낫겠지. 걱정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이 조금은 정돈되는 듯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내려갈 거니까 차에 시동 걸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아내의 얘기를 들어보니 도저히 입원을 못하겠더란다. 비좁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나가자며 울어댔고, 아내가 보기에도 이런 데서 며칠을 갇혀 지낼 자신이 없었다고. 병원에 온 김에 해열 주사라도 맞을까 했지만, 빨강과 파랑 해열제를 교차 복용한 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기에 맞을 수 없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는 병원 출구를 나서자마자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빠 차!"를 외쳤다. 누가 보면 멀쩡한 애를 병원에 데려 온 극성 부모 같아 보였겠다.


 다행히도 열은 조금씩 내렸다. 더 이상 40도라는 숫자는 뜨지 않았다. 한숨 푹 자고 나서 낮에는 집 근처 소아과로 갔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이곳은 코로나 환자도 대면 진료가 가능했다. 진료를 받아 보니 목이 많이 부어 있지만 열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다. 우리도 지난 이틀 동안 난리를 겪었는지라 신속항원검사를 받아봤다.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아이와 계속 붙어있었던지라 각오를 했다. 역시나 양성 판정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간이 진단키트에서 한 줄만 봤었는데, 이번에는 1분도 안 돼서 선명한 두 줄이 떴다. 그걸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가 회복하니 그동안의 긴장이 풀린 걸까. 만화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산왕공고와의 일전에서 모든 걸 쏟아붓고 다음 경기에서 맥없이 무너진 것처럼, 우리도 아이 간호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나서 이제야 아프게 됐다. 병이라는 것도 정신력으로 버텨낼 수 있었던 걸까, 혹은 아이로부터 옮은 후 그저 잠복기가 있었던 것뿐일까.


 나는 하루 온종일 꼼짝할 수 없었다. 롯데월드 자이로드롭을 탄 것처럼 몸이 바닥으로 한도 끝도 없이 주욱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주 서너 병을 마신 듯 머리가 빙빙 돌았다. 목이 칼로 후비는 듯 아파서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타이레놀과 이런저런 약을 삼키고 두꺼운 이불을 몸에 두르고 누웠다. 다행히 아내는 아프지 않아서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아이는 고작 이틀만 아프고 나서 멀쩡해졌다. 열은 더 이상 없고 기침도 하지 않았다. 입맛이 도는지 밥도 잘 먹고, 혼자서 장난감을 갖고 잘 놀았다. 틈틈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와서 “아빠 머 해?”라며 옷소매를 잡아끌다가 별 반응이 없자 재미가 없는지 거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앓고 난 뒤 기운을 차렸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아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모두가 한꺼번에 드러눕지 않고 순서대로 아프니 돌아가며 간호를 할 수 있었다. 병마가 휩쓸고 간 뒤엔 잔불처럼 마른기침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내는 2주가 넘도록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했다. 때문에 아이가 기저귀에 똥을 쌌는데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이렇게 코로나19는 우리 곁을 지나간 걸까. 이제 당분간은 안심하고 살 수 있겠지. 그동안의 걱정과 불안과 강박과는 이제 이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전과 다를 바 없이 씻고 쓸고 닦고 소독을 하고 부주의한 내게 야단을 친다. 엊그제도 선물 받은 블록 장난감을 죄다 검역해야 한다면서 욕조에 다 풀어놓은 채 비누칠을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소독티슈로 닦았다. 수백 개나 되는 조각들을 닦아내는 건 물경 한 시간이 넘는 작업이었다. 내가 볼멘소리로 이제 그놈의 방역청장 같은 짓은 그만해도 되지 않냐, 했더니 아내는 정색하며 대꾸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변이 바이러스에 또 걸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코로나19에 걸리면 이런 문자를 받는다


아이는 삐뽀삐뽀를 처음으로 타 본다며 아픈 와중에도 꺄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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