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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Aug 08. 2022

줄을 서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키즈카페에서 아이와 함께 기차를 기다리며 했던 생각

 아이와 함께 종종 집 근처 키즈카페에 들른다. 코로나 19가 다시 유행이라지만 아이가 워낙 좋아하니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곳의 명물은 아이들이 (때로는 부모들도 함께) 타고 놀 수 있는 실내 기차이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기찻길과 열 량짜리 기차. 매 30분마다 시간에 맞춰 땡땡땡 종이 울리고 기차가 운행된다.


 출발 시각이 되면 키즈카페 사방에 퍼져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이 공간에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하고 다소 놀랐다. 다들 줄을 서서 하나 둘 기차에 올라탄다. 금세 좌석은 만석이 된다. 자리가 없어 자기 차례 앞에서 끊긴 아이는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엄마는 다급하게 아이를 달랜다. 다음번에 타면 돼, 울지 마. 친구가 울든 말든 기차에 탄 아이들은 신이 났다. 소곤대며 웃다가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커다란 웃음을 내지르며 숨길 수 없는 기쁨을 표현한다. 부모들은 기찻길 옆에 붙어 모여서 자기 아이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는다. 자식이 귀여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얼굴을 한 채. 한 시간에 두 번씩 벌어지는 풍경이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 있다. 신림 9동(지금은 '대학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시촌에 살던 시절이었다. 아직 겨울바람이 사나운 2월 말의 어느 날, 행정고시와 사법고시 1차 시험날이 있다. 시험날 아침이면 버스 정류장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평소에는 한산했던 버스가 이날만큼은 만석이다. 도저히 탈 수가 없어서 두어 대 가량 보내고서야 겨우 버스에 오를 수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고시촌 이곳저곳에서 살다가 시험날이면 바깥으로 나가는 것. 버스에 탄 사람들의 모습은 거진 똑같았다. 감지 않아서 떡진 머리, 혹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을 입고 무채색 가방을 둘러멨다. 가방 옆 주머니 한쪽에는 생수통, 다른 쪽에는 우산이 꽂혀있다. 손에는 시험 직전까지 볼 오답노트며 A4 출력물을 쥐고 있다. 얼굴은 초췌하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빛난다. 행색만 보면 다들 모든 걸 포기하고 오로지 공부만 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시험에 붙는 이들은 이중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아내와 연애하던 무렵 종종 4호선을 타고 과천 경마장에 놀러 가곤 했다. 눈앞에서 말을 보는 재미와 함께 승부의 열기에 묘하게 들뜨기도 해서, 의외로 데이트 장소로 괜찮은 곳이었다. 우리는 도박에 목숨 걸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니 재미 삼아 1만 원 정도의 돈을 걸었다. 나름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경기장 관람석으로 나갔다. 이내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늘씬한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말 다리가 땅을 박찰 때마다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말들이 마지막 코너에 다다르자 관람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덩달아 일어나서 베팅한 말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보고선 놀랐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모였는지 앉을자리 하나 남아있지 않고 통로 사이에도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1등, 2등, 3등… 차례로 말들이 들어오고 순위가 결정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탄식과 욕설이 뒤엉켜 터져 나왔다. 여기서도 돈을 따는 이들은 이중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한정된 자리와 자원을 모두가 가질 수는 없다. 시험을 보는 사람들 모두가 어사화를 쓰고서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경마장에 들어온 모두가 1등마를 찍을 수는 없다. 누군가가 성공하면 다른 누군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의 이치. 알고 싶지 않았던 그런 이치를 내리 3년 동안 혹독하게 겪은 나는 결국 고시 공부를 때려치웠다. 시험날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츄리닝을 입고 나가는 대신, 잘 빗어 넘긴 머리에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회사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렇게 회사원이 됐다. 경마장에는 다들 으레 그러하듯 갈 때마다 돈을 잃었다. 다행인 건 나는 잃었지만 아내는 종종 돈을 땄다. 역시 S대 수학과 석사까지 마친 분의 확률 계산은 범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래 봤자 고작 2, 3만 원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꽁돈은 그날 바로 써야 돼, 라는 말을 하며 술을 사 마셨다. 돈은 언제 있었나는 듯 한여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 속 얼음처럼 금세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키즈카페의 기차는 줄을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언젠가 한 번은 탈 수 있다. 차례대로 모두가 한 번쯤은. 이것 참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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