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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Oct 24. 2023

육아는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 셋째도 체력이외다

어린이집 운동회를 다녀오며 생각한 것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어린이집 운동회날.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겠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9월의 어느 토요일 오전, 동네 인근 서대문 문화체육회관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아내와 아이와 함께 체육관으로 차를 달렸다. 아이는 주말인데도 어린이집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웅동... 아니, 운동회? 그게 뭐야." 운동회라는 단어가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좋단다. 가는 내내 쉬지 않고 까르르 맑게 웃고 목소리는 봄날 공기처럼 들떠 있었다. 설레하는 아이와 달리 내 마음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나도 아내도 둘 다 체력 형편없고 운동 신경도 꽝이어서. 혹여나 아이 손을 잡고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나 때문에 아이가 경주에서 꼴등을 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때문에 "아빠 미워!"라며 볼멘소리를 내뱉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이내 도착한 체육관. 운동회가 열리는 3층 대강당 문을 열었다. 안에 갇혀있던 시끌벅적한 소리가 튀어나와 귀를 따갑게 했다. 이미 아이들과 학부모들로 가득 차 있 곳. 수많은 아이들 중 가만히 서 있거나 천천히 걷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각양각색의 소리를 지르면서 우당탕탕 뛰어다니고 있었다. 왜 이 나이대 아이들은 아무도 걷지를 않을까. 동작의 '기본값'이 달리기로 설정되어 있는 것 같다.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정돈해서 배정된 편에 따라 줄을 세우고, 가슴팍에 이름표 스티커를 붙여주고, 제 맘대로 뛰쳐나가려는 아이 손을 붙고. 아직 운동회는 시작도 안 했건만 아이의 엄마 아빠들과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고생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시는구나. 문득 같은 직장인으로서 안쓰러운 동료애 같은 감정이 일어났다.


 어찌어찌 줄을 서고 준비운동까지 마쳤다. 드디어 서막이 오른 운동회. 첫 번째 게임은 공 굴리기였다. 아이는 자기네 반 여자아이 H와 같이 2인 1조로 공을 굴렸다. H는 아이보다 한 뼘은 더 키가 크고 달리기를 잘하는 친구다. 마치 꺼꾸리와 장다리 같은 커플이 공을 어찌나 빠르게 굴리고, 잘 뛰고, 즐거워하며 웃는지. 보는 사람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활기찬 여자아이들을 좋아한다. 같이 놀이터에 가면 잘 뛰어다니는 여자아이들 뒤를 따라서 뛰어다닌다. 짧은 다리로 어떻게든 따라잡아 보려고 열심히 달리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나저나 너는 스포츠걸 취향이었구나. 아빠도 그렇단다. 그래서 <역도요정 김복주>라는 드라마도 재미나게 봤었다야.


 두 번째 게임은 달려가서 손 쓰지 않고 줄에 매달린 과자 따 먹기였다. 아이는 이번에도 같은 반 여자아이 S와 같은 조였다. 요 녀석이 자꾸 여자아이들하고만 노네. 남자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여하튼 또다시 달리기가 시작됐다. 준비, 땅. 아이는 이번에도 열심히 뛰었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절로 손뼉을 치며 응원하게 됐다. 아이는 S보다 훨씬 앞서나가더니 과자도 금방 먹어치우고 혼자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발군의 스피드였다. 나는 아들이 이렇게 잘 달리는 줄 몰랐다. 그동안은 유모차에 태우거나 안고 다니거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거나 해서 그런가 보다. 혹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워만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 나도 모르는 새 아이가 이렇게나 훌쩍 자랐다.


 세 번째 게임 구름 달리기도 재밌었다. 아빠 엄마들이 좌우로 서서 방수천을 맞잡아 들고 있으면 그 위를 아이들이 달려간다. 공중에 떠 있는 기다란 방수천 길을 마치 구름 위를 걷듯이 사뿐사뿐. 하지만 체중이 제법 나가는 아이들은 사뿐사뿐이 아니라 쿵쾅쿵쾅 뛰었다. 그런 아이들이 지나가면 학부모들은 손에 힘을 꽉 주느라고 손목이 시큰거렸다. 이걸 놓치면 달리고 있는 아이가 바닥으로 고꾸라질 수 있으니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한다. 어느 엄마는 요주의 인물, 무려 세 번이나 구름 달리기를 한 발육이 좋던 어느 아이, 가 달려올 때마다 "으아, 쟤 또 온다아아아-!" 라면서 비명인지 경고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마다 어른들은 일순 긴장한 얼굴로 방수천을 힘주어 잡았다.  


 네 번째 게임인 줄다리기를 할 때부터 나와 아내의 체력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만 줄다리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어른들도 시키는 것 아닌가. 3판 2선 승제로 학부모들 간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아이 앞에서 지는 게 싫은지 다들 죽기 살기로 줄을 잡아당겼다. 영차 영차 소리를 지르고,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몸을 기울이고, 얼굴이 시뻘게질 만큼 용을 썼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 짓을 두 번 하고 났더니 어지러워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쉬었다. 나뿐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바닥에 엎드린 채 서로에게 '참말로 못났다 못났어'라는 눈빛을 보냈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게임. 그렇다, 아직도 운동회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이와 학부모들이 함께하는 이어달리기였다. 다행히 우리는 앉아서 구경만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나도 아내도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어른 대표로 뽑히지 않았다. 뽑힌 사람들을 보니 외양부터 이미 스포츠맨, 스포츠우먼들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신발끈을 조여 맨 러닝화, 짧거나 숏컷인 머리, 길쭉한 팔다리까지. 왠지 기대를 하게 했던 T네 외국인 아빠는 달리기에는 썩 재능이 없었다. 긴 다리로 달렸음에도 역전을 당하기만 하자 본인도 멋쩍은지 씩 웃기만 했다. 아이와 과자 따 먹기 같은 조였던 S네 엄마는 "아유, 저 이런 거 못해요."라며 손사래 치더니 엄마들 중 가장 빨랐다.


 우리 아이와 공 굴리기 같은 조였던 H. 그 집 아빠는 어느샌가부터 체육관 한 구석에 앉아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는 자세로. 딸내미는 저렇게나 잘 뛰는데 아빠가 도저히 따라가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머리 하얗게 샌 것이 나이가 있어서 그런 걸까. 사돈 남 말할 때가 아니었다. 나 역시 아들내미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얌전한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남자아이가 맞는구나. 아이는 몸을 쓰는 일이 무척 마음에 든 듯했다. 운동회 끝났음에도 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간식을 먹으면서 여기저기를 마구 뛰어다녔다. 나도 같이 따라다니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고 H네 아빠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앉아 있다가 문득 다짐했다. 이제부터라도 운동을 해야겠구나. 아이와 함께하려면 저질 체력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려 놔야겠구나. 그래서 운동회가 끝난 다음 주부터 출근할 때 종종 사무실까지 계단으로 걸어 오르고, 아이를 재운 후 밤에 홍제천을 걷거나, 쉬는 날 오전에는 아파트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추석 연휴 어느 날 저녁에는 따릉이를 타고 한강까지 달리는 등 그동안 안 하던 짓을 해 봤다. 운동이 하기 싫을 때는 H의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하고 되뇌며 소파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도 육아를 계속하려면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 셋째도 체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길고도 짧았던 운동회가 끝났다. 아이들에게 1등이고 꼴등이고 구분하 건 없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벌써부터 줄 세우기를 가르칠 필요는 없는 법. 모두에게 '참 잘했어요' 상과 메달이 주어졌다. 메달은 먹을 수 있는 쿠키로 만들어져 있었다. 쿠키를 반으로 갈라 아이와 나눠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카시트에 앉아있던 아이가 입가에 과자 가루를 묻힌 채 말했다. 가슴이 철렁해지는 말이었다. "운동회 너무 재밌어. 매일매일 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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