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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Sep 14. 2023

나의 육아 도우미 기안84, 성시경, 그리고 스티브유

아이가 본받을 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만 세 살이 넘어가자 아이와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언제 이렇게 말이 늘었나 모르겠다.


 어느 주말에 아이와 단둘이 경희궁으로 나들이를 갔다. 궐내를 한가로이 돌고, 바깥에 있는 잔디밭에서 한참을 같이 뛰어 놀았다. 왜 이 나이대 남자아이들은 걸어다니지 않고 뛰어다니기만 할까. 기본값이 걷기가 아닌 뛰기로 설정되어 있다. 볼 때마다 의문이다. 실컷 놀고 난 후 궁에 붙어있는 역사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전시를 볼 건 아니고 1층 카페에서 에어컨 바람에 땀도 식히고 시원한 것도 한 잔 마실 겸해서. 주문한 지 얼마 안 돼 금방 나온 딸기 쉐이크를 들고 둘이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마치 어른이 한여름에 마시는 생맥주처럼, "크으." 하고 찡그린 얼굴로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켜는 아이에게 물었다.


 "딸기 쉐이크 맛있지?"

 "응, 맛있어. 100번만큼."

 아이의 세계에서 현재 가장 큰 숫자는 100이다. 그 말인즉슨 최고로 맛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나 맛있었던 걸까.

 "그럼 진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뭐야?"

 "딸기."

 "그래서 딸기 쉐이크가 맛있는 거구나. 그 다음엔?"

 "수박."

 "또 좋아하는 거 순서대로 계속 말해 봐."

 아이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랩을 하듯 말을 이었다.

 "수박, 복숭아, 귤, 사과, 오렌지, 바나나..."

 "잠깐만. 너 바나나 안 좋아하잖아?"

 "아니야 아니야, 좋아해."

 "지난번에 바나나 주니까 하나도 안 먹던데. 그럼 이제 다시 사 줄까?"

 "아니야, 싫어해."

 "그게 뭐야?"

 "우히히히히힛."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옆 테이블의 아주머니 한 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빠가 애기하고 대화가 잘 통하네."


 다음 주말엔 경희궁 근처 성곡미술관에도 들렀다. 요즘 들어 어째 이 동네에 자주 들르게 된다. 전날에 비가 온 탓인지 사람도 별로 없어 호젓하게 걸을 수 있었다. 미술관 전시와 딸린 정원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길고양이 한 마리가 차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부러 내쫓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 둘이서 차 앞에 쪼그려 앉았다. 고양이한테 "야옹." 하고 말을 걸어 봤다. 과묵한 녀석인지 대답이 없었다. 우리도 굳이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으니 고양이는 제 갈 길을 갔다. 그제서야 일어나서 아이와 차에 올라탔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물었다.

 "왜 아까 고양이가 야옹, 안 했어?"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음… 너무 더워서 말하기 힘들었던 것 아닐까?"

 대답을 들은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왜 더운데?"

 "여름이라 덥지. 지금처럼 덥고 땀이 나고 이런 때를 여름이라 그래."

 "그럼 여름 다음에는 뭐야?"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지."

 "가을 다음에는?"

 "추운 겨울이 되지. 두꺼운 옷 입어야지. 진이가 좋아하는 눈이 내리는 겨울."

 "나 눈 좋아! 미끌미끌 좋아. 겨울 다음에는?"

 "따뜻한 봄이 오지."

 "봄 다음에는?"

 "또 여름이 되지. 여름 가을 겨울 봄, 이렇게 계속 돌아가면서."


 아이와 한참을 말을 주고받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이미 세 번이나 겪어 본 사계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절마다 무얼 할 수 있는지도 이야기하고, 잊을 만하면 다시 말없던 고양이 이야기도 하면서. 갓 태어났을 땐 사람 같지도 않던 것을 3년을 키우니 이런 말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서 말을 잘 듣는 건 아니다. 자기만의 의지가 생기고 시나브로 강해졌다. 요즈음엔 뭐 하나 말하면 순순히 듣는 적이 없다. 밥 먹자, 하면 "싫어, 더 놀 거야". 양치 하자, 그러면 "싫어, 과자 먹을 거야". 이제 침대로 가서 자자, 이야기하면 "싫어, 오늘 안 잘 거야". 다섯 살 이후에야 발현된다는 '싫어 싫어' 증후군이 벌써 시작됐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 들으려나 고민됐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타 할아버지가 효과 있었다. "말을 잘 들어야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지. 말 안 듣는 나쁜 아이는 선물 없다." 아이는 자동차 장난감을 받고 싶은 마음에 말을 잘 들었다. 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실제로 볼 일이 없을 할아버지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어느덧 산타 따위에는 무감해진 아이였다.


 산타가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모델링'의 대상이 필요했다. 여느 교육학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이는 자기 주변의 무언가를 관찰하면서 따라하고, 그러면서 배운다잖는가. 아이와 종종 TV를 볼 때 등장하는 장면을 보며 슬그머니 가르치려 해 봤다. 아이에게 TV를 거의 보여주지 않다 보니 가끔씩 보는 화면 속 모습을 아이는 집중해서 본다. 이국의 풍경에 신기해서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고, 맹수나 공룡이 나타나면 무섭다며 눈을 질끈 감고, 연예인들의 노래와 춤을 따라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아이 곁에 앉아서 이런저런 말을 요리에 넣는 양념처럼 덧붙였다.


 가령 식사 시간에 수저를 쓰지 않고 손으로 먹을 땐 인도 사람 이야기를 했다.

 "진아, 너 젓가락질 잘 하면서 왜 손으로 집어먹냐?"

 "시러. 손으로 먹을 거야."

 "손으로 먹으면 너 인도에 살아야겠다. TV에서 봤지?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 먹는다."

 "인도?"

 "그래, 인도. 기안84 아저씨가 여행 갔던 인도."

 "시러. 나 인도 가기 시러. 손으로 안 먹을 거야."

 아이는 기겁하며 손에 묻은 밥풀을 떼고 왼손에는 숟가락, 오른손에는 젓가락을 쥐었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2>를 우연히 봤던 아이.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그곳이 불결한 느낌이었나 보다. 다른 재미난 장면들도 많았지만 유독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아이였다. 인도에 여행가고 싶어? 물어보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덕분에 아이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아이가 웹툰 작가 기안84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아예 보지 않으려 해서 한동안 <나 혼자 산다>를 함께 볼 수 없었다.


 많은 부모들이 스트레스 받는 일, 바로 아이에게 밥 먹이기다. 기껏 차려놨더니 한두 숟갈 뜨고 그만 먹겠다고, 이제 놀겠다고 칭얼거리면 열이 뻗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우리 아이도 밥을 잘 안 먹는 아이인지라 어떻게 하면 많이 먹게 할까 늘 걱정했다. 내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아이가 식판을 싹싹 비우는 것이었다. 너무 안 먹는 날엔 가수 성시경을 소환했다. 아이와 유튜브를 볼 때 종종 이어서 보던 성시경의 먹방 채널 <먹을 텐데>를 좋아라하던 기억이 나서였다. 

 "진아, 너 먹을 텐데 아저씨 알지?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던 가수 아저씨."

 "응, 알아. 먹을 테에엔데에에에."

 아이는 제법 정확하게 음을 내면서 '좋을 텐데' 노래를 불렀다. 

 "그 아저씨 키가 엄청 크다. 우리집에서 팔 뻗으면 천장에 닿을 걸. 왜 그런지 알아?"

 "왜애?"

 "밥을 많이 먹어서 그래. 어제 봤던 영상 기억나지? 콩국수를 한 번에 세 그릇이나 먹었잖아."

 "응, 엄청 많이 먹었어."

 "너도 많이 먹어야 돼. 그래야 키 큰다."

 "응, 나 엄청 많이 먹을 거야. 엄청 키 클 거야."

 아이는 손을 머리 위로 있는 힘껏 뻗었다. 이만큼 더 클 거라면서.  


 아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나를 쳐다보며 이거 봐라, 하던 때. 아직 몸이 연해서인지 손가락을 기묘하게 꼬아댄다. 나는 이미 뻣뻣해져버린 손가락에 아무리 힘을 줘도 비슷하게 따라할 수도 없었다. 내가 힘겨워하자 아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가락을 더욱 열심히 놀렸다. 아빠가 못하는 걸 자기는 할 수 있으니 신난 모양이다. 그러다가 중지와 약지를 꼰 모습이 마치 알파벳 W 모양처럼 됐다. 저거 왠지 익숙한 장면인데. 양손에 W를 만들고 "웨스트 사이드"라고 외쳐야 할 것 같다. 가수 구 유승준 현 스티브유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추임새처럼 넣던 문구. 스티브유가 누군지도 모를 아이에게 말했다.

 "진아, 너 그거 웨스트 사이드다. 아빠 따라해 봐. 웻 사아아읻."

 "우히히히히힛. 웃겨 웃겨. 웻 사아아아이드으으."

 "그거 유승준이라고, 웨스트 사이드 맨날 하던 아저씨 있었어."

 "TV에 나와?"

 "아니, 이제는 못 나와. 옛날에는 많이 나왔어. 인기도 많았어."

 아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못 나오는데?"

 "음... 사람들이 싫어하거든. 약속을 안 지켜서 그래. 군대라는 데 가겠다고 말해놓고 안 갔거든."

 "약속 안 지키면 싫어할 거야?"

 "응. 약속 안 지키면 나쁜 사람 되는 거야."

 "나는 약속 잘 지킬 거야."

 아이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군대를 갈 나이가 되었을 때도 저럴지는 모르겠다만.


 한참을 말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아이가 본받을 만한 사람일까. 아이가 나를 보면서 '나도 커서 아빠처럼 수저를 잘 쓰고, 밥을 많이 먹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될 거야' 라고 생각할까.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이 무섭다는 걸 새삼 더욱 느끼는 요즈음이다. 아이에게 부끄럽지는 않게 살아야 할 텐데.




아이에게 이 아저씨가 '먹을텐데 아저씨'라고 했더니 믿질 않는다. 아무리 봐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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