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들은 상대방은 쉬이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을 기다리는 이들은 재촉하듯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친다. 다 같이 박자를 맞춰 두구두구두구두구. 숟가락과 젓가락들이 달그락거리고 술잔에 담긴 술이 파도치듯 흔들린다. 고민 끝에 나온 대답에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매년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한 시절을 지배했던 건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를 만났다, 만나서 무얼 했다, 때로는 다른 그녀를 만나기도 했다, 같은 이야기를 달뜬 얼굴로 내뱉었다. 해가 지날수록 취업, 결혼, 출산, 육아, 건강 순으로 화두가 바뀌었다.
"올해 가장 슬펐던 일은?"
사람이 살다 보면 기쁜 일만 있을 수 있나, 슬픈 일이 없을 수 없다. 20대의 우리들은 슬픈 일도 역시나 여자와 관련 있는 일이었다. 그녀와 헤어질 것 같다, 그녀와 헤어졌다, 그놈 때문인 것 같다, 혹은 다른 그녀를 만났던 게 걸려서인가보다, 같은 이야기들. 역시나 나이를 먹을수록 이야기의 주제들이 바뀌어갔다. 취업에 실패했다, 승진에 실패했다, 투자를 잘못해서 많이 날려 먹었다, 가족이 아프거나 세상을 떠났다, 요즘 들어 머리가 너무 빠진다. 머리 이야기에 일동 숙연해졌다.
그렇게 매년 친구들과 송년회 겸 신년회를 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쁜 일과 슬픈 일, 그리고 바라는 소원을 이야기하며 한 해를 떠나보내는 게 어느덧 우리네 송년회의 고정 행사였다. 코로나19 때문에 최근 몇 년간은 건너뛰는 해가 있었지만.
작년 매듭달의 마지막날, 아이를 재우고 '육퇴'를 완료한 야심한 시각. 아내와 둘이서 조촐한 송년회를 가졌다. 한 해 동안의 기쁜 일과 슬픈 일은 모두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이승환의 노랫말처럼 딱 세 가지였다. 아이가 밥을 잘 먹고, 양치질을 잘하고, 대소변을 가리게 돼서 기저귀를 떼면 좋겠다고. 이제 아이가 만으로 3살이 되는 해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그나저나 2020년생인 아이는 정부 지침에 따라 3살이라 불러야 하나, 5살이라고 불러야 하나. 나는 5월이 지나면서부터 그동안 동갑이었던 아내에게 때때로 누나라고 부르는 중이다. 아내는 5월생, 나는 10월생이니까. 그럴 때마다 아내는 조용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여하튼.
첫 번째 소원, 식사 때마다 식판을 깨끗하게 비울 만큼 밥을 잘 먹었으면. 아이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마른 편이다. 몸무게가 하위 10퍼센트 정도 되려나. 친구 K의 아들은 무려 한 살이 더 어린데도 13Kg이라 하니 아이와 몸무게가 비슷하다. 어떻게든 아이에게 밥을 많이 먹이려고 애쓴다. 하지만 아이의 식성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맛있다며 연신 젓가락을 향했던 반찬, 오늘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오리고기가 맛있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길래 잔뜩 사놨더니 악성 재고가 돼서 내가 다 먹어치우기도 했다. 시큼한 레몬을 빨아먹으면서 좋아하길래 오렌지며 천혜향이며 귤을 까서 줬는데 너무 시다며 싫단다. 밥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먹기 싫다며 수저를 내려놓을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그나마 일관성 있게 잘 먹는 건 아이들의 영원한 스테디셀러 미역국과 김. 아무리 밥투정을 하더라도 미역국에 밥을 훌훌 말아 떠서 주면 몇 숟갈은 금방이었다. 분명 먹기 싫다던 밥과 반찬이었는데 김에 싸서 주면 "우아, 김밥이다."라면서 잘 받아먹었다. 그러다 보니 1년 365일 중 300일 정도는 저녁밥에 미역국을 먹는다. 지긋지긋하다. 아이 밥 잘 먹이려다 내가 반찬 투정하게 생겼다.
두 번째 소원, 양치질을 잘해서 이가 썩지 않았으면. 올 한 해는 밤마다 전쟁을 치렀다. "자기 전에 치카치카 해야지."라는 말을 꺼내면, 그때마다 아이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도리도리 고갯짓을 했다. 치카치카의 '치' 자를 말하자마자 자동으로. 이건 뭐,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어르고 달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겨우 화장실로 끌고 가서 양치를 한다.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뭐가 문제일까. 아마 치과를 다녀온 날부터였던 것 같다. 이 나이대 즈음엔 치과를 한 번 가 봐야 한다더라. 불소 도포 같은 것도 해야 한다고. 만 3살이니 젖니는 다 났고, 이마다 편차가 있지만 적어도 2년 정도는 쓴 셈이니 점검을 받을 때도 되었다. 휴대폰도 2년을 쓰면 슬슬 고장이 나잖나. 동네 어린이치과에 예약하고 들렀다. 장난감과 인형과 뽀로로와 핑크퐁 영상으로 가득 찬 키즈카페 같은 곳이었다. 물론 치과가 처음인 아이에겐 그따위 것들 죄다 별무소용이었다. 불소칠은커녕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입을 앙 다무는 아이. 겨우 입을 벌려서 확인했더니 충치 위험을 보이는 이가 몇 있단다. 그때부터 밤마다 양치를 '제대로' 눈물 콧물 쏙 빼 가면서 했다. 그래서 양치를 싫어하게 된 듯하다. 당분간은 전쟁같은 사랑, 아니, 양치를 할 수밖에 없다.
셋째, 대소변 가리기를 훈련해서 기저귀를 뗐으면. 올해 1월 1일이 되자마자, 그러니까 아이가 32개월 때부터 특훈에 돌입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유아용 변기를 사서 거실 잘 보이는 곳에 뒀다. "어라, 이게 뭐지? 응가하고 쉬야하는 예쁜 변기잖아. 형아 되려면 변기에 앉아서 싸야 한다던데에-?" 어설픈 동작과 대사로 열연을 펼치며 변기에 앉아 힘을 주는 시늉을 냈다. 아이는 금방 흥미를 보였다. 아빠를 따라 변기를 만져보고 바지와 기저귀를 벗고 앉아 보기도 하고. 하지만 정작 쌀 때가 되자 기저귀를 입혀 달라며 칭얼댔다. 실패와 시도와 거부와 교육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1월 중순, 대망의 첫 오줌과 첫 똥을 변기에 쌌다. 몇 달이 지나 자신감이 붙은 뒤엔 밤에 잘 때도 기저귀 대신 팬티를 입혔다. 자다가 오줌을 싸는 바람에 다음날 아침 수 차례 이불 빨래를 하는 시행착오의 나날들을 보냈다. 만 3살이 지나고 여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됐다. 다 큰 아이처럼 외출할 때도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게 됐다. 겨울에는 이제 필요없게 된 기저귀를 그러모아 당근마켓에 팔았다. 아이가 왠지 한 뼘은 더 자란 것처럼 보였다.
지난 한 해 동안 세 가지 소원을 이뤄가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예전에 빌었던 소원들은 분명 이런 것들이 아니었는데. 주로 나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성취를 이룰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같은 것들. 그런데 지금은 소원이랍시고 빌었던 게 고작 세 가지인데 그마저도 모두 아이에 대한 것들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시나브로 아이라는 세계에 매몰되어 버린 건 아닐까. 육아를 하다 보니 나도 별 수 없는 아빠의 마음이 되었구나, 싶으면서도 '나'라는 사람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싶어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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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3년의 마지막날. 올 한 해 가장 기뻤던 일은 동생이 병원을 개원한 것이었고, 가장 슬펐던 일은 동생이 죽은 것이었다. 지금 나의 유일한 소원은 동생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린 동생과 다시 함께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동생아. 나의 아이, 그러니까 너의 조카는 이제 나보다 젓가락직을 더 잘하면서 밥도 곧잘 다 먹고, 인상은 쓰지만 양치질도 잘하고 엊그제는 마침내 치과에 가서 불소 도포라는 것도 했고, 혼자서 바지와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아 대소변도 본단다. 1년 동안 이렇게나 많이 자랐다. 삼촌한테도 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