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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ul 02. 2020

육아는 아이템빨이라더라

아이 낳기도 전에 산더미처럼 쌓인 짐들

 누군가가 말하길 육아는 아이템빨이라고 하더라. 프랑스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송은 인간의 본질은 ‘도구를 이용해 유·무형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인간을 일컬어 '도구의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 칭했다. 그 말마따나 내가 자연인도 아니고 맨몸, 맨손으로만 아기를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인간다운 육아 생활을 위해 도구들을 사러 나서보기로 했다.


 아내의 배가 제법 불렀을 때 즈음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맘앤베이비 엑스포>라는 행사에 들렀다. 주변 사람들은 엑스포에 가 봐야 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의 두 파로 갈라져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찬성파는 육아 초보들은 어떤 물건들이 필요한지 잘 모르니까 눈으로 직접 한 번 봐야 감이 잡힌다는 의견, 반대파 측에서는 어차피 필요한 물건들은 알아서 사게 될 텐데 괜히 엑스포 따위에 가면 호객 행위에 낚여서 쓸데없는 지출만 늘어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가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고민 끝에 우리는 '한 번 가 보긴 하되 거기서 물건을 사지는 말자'는 지킬 수 있을지 모를 다짐을 하고서 길을 나섰다.


 행사는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였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육아 용품들과 수많은 업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낯선 세상이었다. 막연하게 유모차는 괜찮은 걸로 하나 사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 '유모차의 세계'에서는 국산인지 외제인지, 바퀴 크기가 얼마나 큰지, 몇 단으로 접히는지, 접는 건 얼마나 쉬운지, 일체형인지 바구니를 끼우는 형태인지, 높이 조절은 되는지, 커버는 어떤 걸 쓰는지 등에 따라 각양각색의 녀석들이 저마다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물건 하나 사는 데 따질 것도 많고 종류도 너무 많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단 유모차뿐이랴, 우리는 처음 접하는 신세계의 문물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한참 동안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 모습은 마치 개화기 무렵 미국에 파견되어 근대 문물을 견문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졌을 조선의 보빙사 일행과 비슷해 보였을 게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육아 용품 지식을 흠뻑 충전해 온 아내는 미친 듯이 인터넷 쇼핑을 시작했다. 아내의 장점 중의 하나. 일단 결정을 내리면 망설임 없이 단호하고 신속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벨소리와 현관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택배, 택배, 또다시 택배가 밀려드는 나날들이었다. 어느 날은 하도 택배 박스들이 많이 쌓였길래 사진을 찍어봤다. 휴대폰 사진첩에 남아있는 어마무시한 양의 박스들은 그동안 샀던 물건들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육아 용품들을 죄다 주문한 듯하다. 가제수건, 물티슈, 아기 옷 같은 물건들은 지인들로부터 선물도 많이 받았다. 새로 산 것뿐만 아니라 물려받은 동화책, 아기 의자, 모빌 등의 물건들도 방 한 구석에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다들 이렇게나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실 줄이야.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더니 정말 그렇다.


 '아기 용품들의 산'이 만들어지는 걸 보다 보니, 문득 우리가 도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영국 출신 작가 겸 방송인이자 학자인 바이바 크레건리드는 저서 <의자의 배신>에서는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오히려 인간의 몸을 해치고 있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한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거나 집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는 의자라는 물건이, 실은 오랫동안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해 와서 아직까지 석기시대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인류의 몸에는 맞지 않는 탓에 요통이나 기타 질병에 시달리게 하는 원흉이란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냥 도구만을 찾기보다는 몸을 부딪쳐가며 아이를 돌봐야 하지 않을까? 부모의 체온과 숨결과 손길이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가 닿을 수 있게 말이다. 우리 최대한 날 것의 육아법으로 아기를 키워보자. 이제 도구는 그만 사 모으고. 몸이 힘들고 지친다고 해서 스마트폰으로 뽀로로 영상 따위나 틀어서 아이에게 대충 던져주는 그런 부모는 되지 말자. 역시나 지킬 수 있을지 모를 다짐을 아내와 함께 되뇌어본다.


 하지만 인간은 호모 파베르라니까 도구를 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창 육아용품 쇼핑 삼매경에 빠져있을 땐 상상도 못 했던 먼 훗날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그때의 나에게 스포일러 하듯 몇몇 도구들의 소중함에 대해 미리 알려주고 싶다. 물론 아이를 아직 60일밖에 키워보진 않은 초보인지라 기초적인 육아 아이템들만 사용하지 못해 봤지만은. 말 못 하는 고마운 존재들에게 특별히 해줄 건 없고 다음과 같이 호명이라도 해 주면서 그들에게 감사함을 표해 본다.


 (1) 쪽쪽이(공갈 젖꼭지)

 아기가 울음을 도저히 달랠 수가 없거나 잠투정 때문에 칭얼거릴 때 요거 하나 입에 물리면 만사가 해결된다. 도구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그리도 다짐했건만, 어느덧 쪽쪽이 없이 아기를 재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손이 가게 된다. 입을 쪽쪽거리면서 눈이 스르르 감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찌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우리의 육아를 망치러 온 우리의 구원자', 그게 바로 쪽쪽이다.


 (2) 분유 포트

 분유를 탈 물을 재빠르게 100도까지 끓여줄 뿐만 아니라 적정 온도인 40도에 맞춰 유지해주는 과학기술의 결정체. 물 온도가 뜨거운지 차가운지 매번 손등에 뿌려서 가늠하는 일 따위는 이제 옛날에나 하던 짓이 되어버렸다. 신생아를 돌보는 부모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꺼졌다가 하며 오락가락하는데, 분유 포트는 주변 환경이 제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흔들림 없이 묵묵하게 온도 유지라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루 종일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면 왠지 수행 깊으신 큰스님의 모습 같기도 하다.


 (3) 소리 나는 모빌

 신생아는 아직 시각이 발달하지 않아서 청각과 후각에 주로 의존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어째 눈을 빨리 뜬 것 같다. 우리 역시 부모라면 한 번은 겪는다는 '우리 아이 천재설'의 늪에 빠져서 그렇게 착각하는 걸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아기 침대에 달아뒀던 모빌을 한참이나 쳐다보면서 생글거리는 게 암만 봐도 1개월 된 신생아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다가 이제 지쳐서 칭얼거릴 때 쯤 모빌의 태엽을 감아서 오르골 소리를 들려주면 또다시 생글거린다. 아이의 울음을 막으려면 집 안 모든 곳에 모빌을 하나씩 달아놔야 하나.


 (4) 가제수건

 처음에는 가제수건이 뭔가 했다. 재봉이 덜 된 가제본 수건을 말하는 건가, 거즈(gauze)를 가제라고 발음하게 된 건가, 여하튼 아기용 손수건 따위가 뭐가 그리 필요할까 싶었다. 궁금증은 조리원을 나온 다음날부터 곧바로 풀렸다. 목욕할 때 물을 묻혀 얼굴도 씻기고, 틈틈이 몸도 닦아주고, 젖 먹을 때 입에서 흘러내리면 턱받이처럼 받쳐 주고, 트림을 덜 시켜서 우웩 하고 게워내면 닦아줘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하얀 가제수건을 쓰게 된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물건이다.


 아이가 커 갈수록 앞으로 어떤 또다른 도구들이 도움이 될는지 궁금하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길이 한참이나 남아있다. 선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주변 육아 선배들께 여쭤보니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아이템들이 유용했다, 꼭 필요할 것 같았던 아이템들이 쓸모없는 때가 있더라, 같은 경험담을 얘기해 주시고들 한다. 그나저나 나는 요즘 새로운 육아 도구인 '아기 전용 세탁기'가 그렇게 끌리더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아기 옷가지나 가제수건, 턱받침 등을 빨래할 일이 생겨서 아주 환장하겠다. 우리가 입던 옷을 따로 빨아야 하니 하루에 심지어 세탁기를 다섯 번이나 돌린 적도 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그런 물건의 존재조차 몰랐었는데 이렇게 하나 둘 육아의 세계를 알아간다.


우리 집 현관 앞엔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 박스들이 줄을 섰다.
쪽쪽이를 물고서 잠이 들락말락. 으어- 쪽쪽이에 취한다. 주모, 여기 쪽쪽이 한 사발 더 추가요!






 아이가 태어나려면 아직 두어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육아 용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만 갔던 우리 집 풍경. 아내는 어찌나 꼼꼼한지,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서 온갖 물건들을 주문하고 받아서 세탁이나 소독을 하고 그것들에 일일이 라벨까지 붙여가며 가지런히 정리를 해 댔다. 누가 보면 육아 유경험자인 줄 알겠다. 아니, 어쩌면 경험하지 못했기에 지나치게 열심히 준비하는 육아 초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모르니까 이렇게 열심일 수 있는 거다.


젖병 소독기, 분유 포트, 젖병, 유축기, 가제수건 및 물티슈, 기저귀, 수딩 젤과 아기 로션 등등.
아기옷을 종류별로 포장하고 라벨까지 붙여놨던 아내. 이쯤 되면 정리벽이 있는 거 아닌가 의심된다.
오르골이 달린 이 모빌은 훗날 아이가 무척 좋아하는 아이템이 된다.






 마지막으로는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는 물건을 하나 선물 받았다. 어머니께서 지인분을 통해 구해 온 연보랏빛의 털신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아이가 신는 신발이라기엔 얼기설기 볼품없이 생겨먹었다.


 “느이가 애가 안 생기는 거 같아갖꼬 영험하다는 분한테 받아 온 기다. 귀한 물건인기라. 그분한테 이 신발 받아온 사람들은 전부 다 애가 생겼다카이.”


 알고 보니 신발이라기보단 부적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연애한 지 11년,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않고 있으니 겉으로 표현은 못해도 집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보다. 며느리에게 부담 주는 나쁜 시어머니처럼 보일까 봐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는 말도 못 하시고 속으로만 마음 졸이셨다고. 혹여나 우리 부부가 노력을 하는 중인데도 임신이 안 되는 걸까 싶어 이런 미신 같은 털신을 받아오셨다고. 당신은 교회를 다니시는 분이시면서 참말로 별일을 다 하셨습니다. 손주가 뭐길래. 자식들에 대한 걱정과 혹여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어쩌나 하는 조심스러움과, 그러면서도 간절하게 바라는 원이 모두 담겨있는 조그마한 털신을 받아들고 거기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서 코끝이 찡해졌다. 그럼에도 살면서 단 한번도 살가운 표현을 해 본 적 없던 아들인지라 마음과는 다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에이, 쓸데없그로 뭘 이런 걸 받아 왔심니꺼. 이런 거 다 미신입니데이.”


 어쩌면 아내가 예상 외로 쉽게 임신한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말 용한 털신 덕분에 아이가 생긴 걸까. 간절한 바람이 담긴 물건은 뜻하지 않은 힘을 지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영험한 물건 덕분인지 2020년 4월 2일, 우리 복이는 마침내 머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그동안 초음파 사진을 찍어 볼 때마다 계속해서 거꾸로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길래 수술을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한 달을 남겨두고 마침내 '역아'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 출산 예정일인 5월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을 때, 산더미처럼 쌓인 육아템들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영험하신 털신 덕분에 아이가 생긴 거라고? 머리도 아래로 내려가게 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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