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 만삭 사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아서 산후조리원을 알아보던 중. 패키지 상품으로 산전 마사지, 만삭 사진 혹은 50일 기념사진, 백일잔치 행사 등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만삭 사진이라는 게 대체 뭐야?"
휴대폰을 들어 검색해 봤더니 임신부들이 한껏 부른 배를 쓰다듬거나 감싸 쥐면서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들이 주르륵 떴다. 왠지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보는 듯했다. 배가 저렇게나 나왔는데 어떻게 팔다리는 툭 치면 부러지기라도 할 듯 가느다랄까. 마치 영화 <E.T.>에 나오는 외계인을 보는 것 같다.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들도 프레임 안에서 희한한 포즈와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채 등장했다. 아내의 배에 귀를 갖다 대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거나, 보름달 같은 배를 보고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배를 받치는 등 별의별 과장된 자세들이 다 있다. 에구머니나, 대단한 자신감을 지닌 어떤 부부는 둘 다 조그만 천 쪼가리만 두르고서 헐벗은 채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제 그만. 어색하고 민망해서 더는 못 보겠다.
"나는 이런 거 안 찍을 거야. 찍을 필요가 없어."
만삭 사진의 이미지들을 찾아본 지 10초도 안 돼서 튀어나온 아내의 선언이었다. 과연 아내다운 반응이었다. 전공에 따른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수학과 박사 과정까지 밟은 이과생 아내는 예전부터 '실용성'을 무척 중시하는 사람이다. 1.이게 정말 필요한가? 2.하기로 했다면 얼마큼의 효용 가치가 있는가? 3.결과물은 과연 목적에 부합했는가?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런 아내에게 만삭 사진을 찍는다는 건 아무래도 비합리적이라 생각했을 터. 결혼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3종 세트라는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웨딩드레스, 메이크업과 헤어)'는 아내에게 허례허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루 온종일 스튜디오에서 사진 따위 찍는 건 시간 낭비니까 연애하면서 우리가 찍었던 사진들로 대체. 드레스는 많은 고민할 것 없이 이것저것 몇 벌 입어 보더니 당일날 바로 결정. 메이크업과 헤어는 도저히 본인이 직접 할 수가 없으니 식날 당일 아침 간단하게 하는 걸로 끝냈더랬다.
이에 반해 뼛속까지 문과생인(기실, 수학 성적이 좋지 않아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문과생이 되긴 했지만) 나는 아내와 항상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꼭 합리적으로만 살 수 있냐, 너는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에 대해 모르느냐,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아르키아 변호문>에서 인문학을 변호했던 그 유명한 구절에 대해 알고 있느냐, 사람이 어찌 밥만으로 살 수 있으리오, 라며 농을 칠라 하면 아내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런데,
"혹시... 너 지금 배 나오고 살쪄 보여서 사진 찍기 싫은 건 아니지?"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내가 괜히 꺼낸 말의 가시에 찔려 아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서였다. 직장선배 Y는 아내분이 임신했을 때 무심코 "다리가 장미란인데?"라고 말했다가 6년째 구박받고 있다 들었다. (물론 장미란 선수의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은 아니다.) 아내 역시 임신을 하고 나서 당연히도 배가 불러왔고, 예전에 비해 살이 제법 쪘다. 그래서 연예인처럼 비현실적인 외모들을 자랑하는 만삭 사진들을 마주하고서 혹여나 주눅 들지나 않았을까,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과 자신의 몸을 비교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됐다. 팔다리가 가늘고 길고, 피부는 뽀얗고 매끈하고, 몸매는 소위 S라인을 유지하면서 희한하게 배만 볼록 나와 있고, 짙은 화장을 한 얼굴은 다들 작으면서 예쁘고 잘 생긴 사진들. 그렇게 포토샵의 힘을 과하게 빌린 보정 사진들을 보면서 말이다.
문득 대학생 시절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의 거리를 걸으면서 느꼈다. '지나가는 남자들은 왜 이렇게 다들 잘생겼지?' 하나같이 키가 크고, 얼굴이 작고, 콧대가 높고, 턱이 날카롭고, 눈이 큼직한 미남들 투성이었다. 그러다가 버스 차창이나 카페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치면 흠칫 놀라곤 했다. 왜 이렇게 못생겼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서구인과 다른 동양인의 얼굴을 지닌 게 당연한 건데. 문제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내 생각 아닐까? 나도 모르게 서구인의 외모를 '美의 기준'으로 스스로 내재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자기 반성을 했다. 만삭 사진에 등장하던 임신부들 역시 미디어가 정해 놓은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만들어진 모습' 같다. 그리고 그런 사진을 보면서 임신부도 자기 관리를 해야 해, 임신했지만 이렇게나 예쁘고 날씬해, 산모도 여자랍니다, 따위의 말을 하는 것도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심히 불편해졌다. 비단 SNS나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획일화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보디 토크(body talk ; 외모에 대한 대화)'의 일상화도 외모 지상주의를 확산한다고 하니까.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러네이 엥겔른은 저서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 "팻 토크를 하거나 타인의 팻 토크를 들을수록 신체 혐오와, 신체 감시, 섭식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라고 말한다. 외모에 대한 언급 자체가 개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살쪄 보여?" 라는 아내의 물음에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젓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안아주는 일이었다. 거짓된 칭찬도, 과장된 걱정도, 신체 부위에 대해 어떠하다는 평가도, 그리고 만삭 사진에 어울리는 몸을 만드는 것도 모두 쓸데없는 짓이니까. 너는 너로서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았으면 한다.
"스튜디오에 가기 싫으면 내가 찍어줄게, 만삭 사진.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나. 요즘 코로나 19도 무서운데 쓸데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자."
배가 나왔든 살이 쪘든 피부가 거칠어졌든, 내 눈에는 아내는 언제나 같은 모습의 아내일 뿐. 지금의 아내 역시 항상 그랬듯이 예쁘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스튜디오에서 만삭 사진 따위를 찍기 싫어하는 아내를 위해 내가 직접 카메라를 들기로 했다. 부풀어 오른 배만 찍으면 되니까 뭐 그리 어렵겠나, 하는 자신감에서였다. 그런데 내가 직접 사진을 찍음으로 인해 누군가의 밥벌이를 뺏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이쪽 업계'의 시장 규모와 현황에 대해 알게 된 후였다. 비단 스튜디오 만삭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스드메니, 신혼여행이니, 임신 패키지, 산후조리원, 육아 용품, 이후에 이어질 유아 교육 분야들까지. 출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터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밥벌이를 하면서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아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해 하는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는' 일에 다들 이렇게나 열심이다.
(물론 스튜디오에서 전문가들이 찍은 사진에 비하면 내 사진은 형편없었다...)
아내는 '쓸데없다' 생각하던 스튜디오 만삭 사진 촬영은 하지 않았지만, '쓸 데 있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출산 준비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출산 전 마지막 준비로 '출산 가방'을 꾸려야 할 때 즈음, 예의 1, 2, 3단계 순서도를 머릿속으로 돌려 본 아내는 의욕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세면도구, 슬리퍼, 걸쳐 입을 가벼운 외투, 양말, 속옷, 산모용 패드, 좌욕 도구, 아기를 위한 물티슈, 배냇저고리, 속싸개, 겉싸개 등등. 그리고 코로나 19 시국이니만큼 마스크와 손 소독제까지 빈틈없이 준비해서 여행용 캐리어에 가득가득 채워 넣는 모습이 마치 기계 같았다. 어찌나 꼼꼼하고 정확하면서 동시에 신속하기까지 한지. 옆에서 별 할 일 없이 거들던 나의 모습은, 몇 해 전 AI와 인간의 바둑 대결에서 알파고가 산출해 낸 수에 따라 손으로 바둑알을 대신 놔주던 아자 황과 다를 바 없었달까. 이런 아내와 함께라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가며 살아도 될 것 같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등장 인물이었다면 인공지능 스카이넷에 누구보다 빠르게 투항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게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분만실 위치까지 숙지 완료했다.이제 정말 아이 낳는 일만 남았다. 예정일이 1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라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리, 무사히 출산을 해낼 수 있겠지? 하는 걱정으로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