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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un 06. 2020

이제 그만 내 딸과 헤어져 주게

어색하리만큼 한적했던 창덕궁 인정전
궁의 봄꽃은 눈부시다
낙선재로 내려가던 길
단청과 지붕 처마가 참으로 곱다
후원 가는 길에 피어있던 홍매화는 내년에도 피겠지요

Samsung af slim zoom 70s

Samsung zoom 35-70mm auto macro lens

Kodak colorplus 200 film

2020년 4월





 지난 봄, 창덕궁에 들렀다. 집에만 갇혀있는 답답을 참지 못바깥으로 나갔던 날이었다.


 이 창궐한 탓에 마스크를 단단히 매어 쓰고 손 소독제도 주머니에 두둑하게 챙겨 넣고서 길을 나섰다. 원래 삼청동에서 감사원 후문, 와룡공원을 거쳐 성북동까지 차에 탄 채로 내리지 않고서 한 바퀴 돌아보려 했다. 그런데 차를 달려가다 보니 창덕궁 노상 주차장에 자리가 남아있는 게 보였다. 곳에 빈자리가 있는 흔치 않순간. 코로나19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썰물처럼 사라진 데다가 최근에 주차도 두 배로 올라서. 회를 놓칠세라 얼른 주차를 하고 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가 보니 사람 하나 이 한적하다. 일요일 점심 무렵임에도 이런 텅 빈 도화지 같은 광경을 보게 되다니 살면서 이런 날이 또 있을까 싶다. 궁으로 들어가 진선문을 지나 정전인 인정전까지 걸어가는 중에도 람은 고사하고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기는 궁이 아니라 사극 찍던 세트장가. 혹시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꿈같은 장면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몇몇의 관람객들과 마주치고서야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손으로 세어 봐도 손가락이 남겠다. 렇게  빈 궐 내를 한참이나 걸었다.


 오랜만의 바깥 나들이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야외이니만큼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하겠지, 하는 마음에 나갔었는데 거리두기를 넘어서 마치 자가 격리 체험해 본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2020년엔 원더키디와 우주여행을 하고 백투더퓨처에서처럼 호버보드를 타고 다닐 줄 알았는데, 느닷없는 병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타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해지며 기댈 곳 없는 약자들은 신음하고 아직까지도 인종차별이 횡행하는 세상일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 했다.


 창덕궁에 때면 으레 가는 찻집이 있다. 여길 들르지 않고 궁 나들이를 끝내 버리, 애정하던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놓쳐버린 듯 찝찝하다. 궁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안국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나타나는 '브람스'라는 오래된 가게. 왠지 카페라는 호칭이 아니라 다방, 혹은 찻집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다. 인사동에 처음으로 가 봤던 대학교 1학년 촌놈 시절 때부터 늘 궁금했었다. 저기 건물 2층에 있는 브람스는 대체 어떤 곳일까, 오래된 다방처럼 생겼는데, 아마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쌍화차에 계란 동동 띄워 마시는 그런 곳이겠지. 브람스와 같은 클래식 LP 판 같은 걸 하루 종일 틀어놓는 음악 카페인 건가. 을 적엔 이곳에 선뜻 발걸음을 내딛기 꺼려졌었는데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인망설임 없이 들어가게 된다. 이대에 어울리는 장소라는 게 있 이제는 클럽이나 포차 따위가 아니라 이런 고즈넉한 장소가 더 끌린다. 그래도 인근 서순라길 힙한 수제맥줏집들까지는 아직 눈치보지 않고 갈 수 있는 나이니까 너무 늙은 척은 하지 말아야.


 처음으로 여기 찻집에 들어섰던 날이 생각난다. 대학생 때 이곳 간판을 처음 본 이후로 무려 14년 만에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본 날이었다. 


 한글로만 써진 간판들이 가득한 안국역 인근 물들  어느 한 곳,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지에스25(GS25가 아니라 지에스25)' 편의점이 1층에, 브람스는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올라가는 계단 벽면엔 이게 웬걸, 브람스나 베토벤의 초상화가 아니라 비틀스 포스터가 붙어있다. 왠지 올드팝을 틀어주는 LP 바 느낌이 물씬 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발자국을 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뭇 바닥 소리가 울려 퍼진다. 생각보다 굉장히 삐그덕거린다. 여기서 무전취식하고 도망가려다간 금방 들켜서 잡혀버릴 만큼 큰 소리가 난. 초등학 때처럼 방과 후에 테이블을 한쪽 구석에 밀어 넣고 걸레에 왁스를 잔뜩 묻혀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열심히 밀어줘야 할 것 같다. 상태를 보아하니 정말 30년 된 오래된 가게가 맞나 보다. 손님들이 별로 없는 덕에 전망 좋은, 그래 봤자 안국역 사거리와 자동차의 행렬만이 보일 뿐이지만,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는데 이름도 고색창연한 '다방커피'라는 게 눈에 다. 커피며 전통차며 맥주 등등을 팔고 있었지만 그중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메뉴는 역시 다방커피였다.

 "다방커피는 어떻게 나오는 건가요?"


 아내가 사장님께 여쭤봤다. 전통차 니아인 나는 오미자차를, 커피 마니아인 아내는 한참 고민하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다방커피를 시려던 이었다.


 "커피에 프림, 설탕을 같이 내주는 거니 취향에 맞게 타 드시면 돼요."

 

 사장님께서 웃으면서 대답해 주셨다. 프림 두 스푼, 설탕 두 스푼이면 적당할 거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럼 왠지 안성기 톤으로 "커어퓌는 맥씨임-" 이러면서 마셔야 할 것만 같다.

 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두리번두리번 가게 내부를 살펴봤다. 다시 한 번 찬찬히 톺아봐도 정말 오래돼 보이는 곳이다. 낡아 보이는 스피커에서는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과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세레나데'같은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가게 이름이 브람스라서 하루 온종일 브람스 음악만 트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다. 몇 곡이 흘러나온 뒤 사람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게 들리는  아마 클래식 FM 라디오를 켜 놓은 듯. 다음번엔 괜찮은 브람스 앨범이라도 하나 들고 와서 틀어 달라고 해 볼까, 싶었다.

 그런데 찻집손님들이 별로 없는 데다 조용한 분위기이다 보니 저 멀리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게 들렸다. 일부러 귀를 기울여 엿들은 건 맹세코 아니다. 물론 우리 부부도 간혹 남들의 대화를 열심히 엿듣는 때가 있는데, 신촌이나 홍대 등지의 레스토랑에 갔을 때 옆 테이블에서 마치 소개팅 중인 듯 서로 낯설어하는 남녀 한 쌍이 보일 때가 바로 그 때다. 너무나도 긴장되고 설레고 흥미로운 순간이라 도무지 엿듣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으니까.  청춘들이 앞으로 잘 될까, 아니면 이 만남에서 인연이 끝나 버릴까 궁금해하면서. 여하튼 그날 브람스에서도 낯선 이들의 대화 몇 마디를 본의 아니게 훔쳐 들었는데 왠지 분위기가 묘했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그분들의 사생활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요약하자면, 딸의 어머니가 딸의 남자 친구에게 이만 헤어져 달라고 설득하는 중인 듯했다. 이 장면은 마치 윤종신의 노래 '너의 어머니'의 가사를 그대로 재현한 것 같다. 이 정도면 우리 OO이도 할 만큼 하지 않았나. 미안한데 이제 그만 만났으면 좋겠네.  말 뜻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믿네. 머니의 말 채 끝나기도 전에 딸로 보이는 젊은 여자는 화를 내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그녀의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얼핏 쳐다보니 그는 얼굴이 희고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그런데 참,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계속 듣고 싶다. 이런 걸 길티 플레라고 야 하나. 이 자리의 파국은 대체 어떤 광경 자못 궁금해졌다.

 하지만 엔딩까지 잠자코 훔쳐 보기엔 마음이 불편해졌다. 좋은 음악과 옛스러운 분위기가  좋았는데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마치 아침 드라마에서나 보던 광경을 직접 맞닥뜨리니 당황스러울 따름이. 에이, 아니겠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거. 그저 흘러나온 대화 몇 조각만 듣고선 우리가 엉뚱한 오해를 한 것이기를 바다. 아직 시켜놓은 차를 다 마시지도 못했고, 그쪽 테이블의 결말의 목격자도 되지 못했 아내와 함께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어나 찻집을 나왔다. 안국역을 향해 걸어가면서 한참이나 그 커플과 여자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는 나중에 우리 딸을 낳았어. 근데 걔가 남자를 데려왔는데 네 마음에 안 들면 반대할 거야? 만나지 말라고?"


 아내가 물었다.


 "당연히 반대하지."


 내가 대답했다. 의외로 고민되지 않아서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을 하면서도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단호함에 나 스스로에게 적잖이 놀랐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그동안 나는, 나와 다른 상대방을 포용하는 열린 자세를 중시하는 나름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했. 지만 당장 내 자식문제라고 생각하니 마음가짐이 금방 바뀌어 버리고 마는 꼴이란. 식은 자식 본인의 인생을 사는 거고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며, 때문에 자식에게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게 아니다. 리가 할 일은 우리 아이가 보통의  인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 는 것까지이고 그 이후엔 그저 지켜볼 일이다. 그게 올바른 교육법이라고 생각해왔다.


 분명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자 하는데 마음은 쉬이 따라오질 못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 바른 주장이라 하더라도 정작 나의 입장이 되면 생각이 달라지는 게 사람인가 보다. 그동안 겉으로 아무리 그렇게 떠들어왔다 하더라도. 아직 '아는 것이 행하는 것의 시작이고 행하는 것이 아는 것의 완성이다'의 명제를 수행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멀었다. 이태원을 뻔질나게 다니면서 타인성적 취향이란 내가 감히 간섭할 것도 비난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녀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자신이 성소수자라고 고백한다면 나는 과연 화내지도 슬퍼하지도 않을 수 있을까.  해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난민 문제  마찬가지다. 보편적 인권을 생각해서 한국도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내 옆집에 무슬림 이웃이 이사 온다고 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하기 어려울 터. 부동산이라고 안 그럴까. 집값을 잡겠다는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지지했으면서도 이제 내가 아파트를 가진, 뭐라도 한 줌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되니 집값이 마냥 오르기만을 바. 예의 자식 교육에 대해서도 그렇다. 내가 다니는 일터는 설립 목적 중 하나가 '공교육의 보완'임에도 불구하고 부장이며 센터장들 같은 간부들은 자녀들을 해외로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들 일색이다. 남의 자식은 공교육을 받더라도 내 자식은 그렇게 못하겠다는 . 사람 마음이 결국 다 그렇다.


 나도 리 대단한 사람은 아닌지라, 나중에 내 딸이 본인의 마음에는 드는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를 데려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혐오해왔던, 앞과 뒤가 달랐던 사람들과 똑같이 말이다.


 "자네, 이제 그만 내 딸과 헤어져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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