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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린나 Apr 23. 2019

빈센트 반 고흐의 삶(4) : 아를에서 꿈을 꾸다.

악수를 건네며, 러빙 빈센트

‘빛’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예술가의 도시 파리에서 빈센트는 많은 새로운 영감을 받았지만, 그곳의 무절제할 정도의 화려함은 그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2년간의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낀 빈센트는 이제 진정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림에 담아야만할 빛과 색이 실제로 있는 곳, 마치 우키요에 속 일본 같은 곳, 그런 곳을 찾아 프랑스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론 강(Rhone)을 품은 작은 도시, 아를에 도착한 건 1888년 2월이었다. 그곳의 햇살에 너무나도 만족한 빈센트는 다른 화가들도 아를로 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파리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마음의 평안이랑 차분함을 회복할 만한 데가 없다면 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완전 옴짝달싹 못하게 될 거야.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프랑스 아를. 1888년 2월21일


1919년, 아를의 사진. 고흐의 '노란집'은 왼쪽 상단, 큰 길이 교차하는 쪽에 있다.



아를의 밝은 빛과 '진짜' 색깔의 화려함은 실로 감격스러웠다. 막 봄이 시작되던 때 아를에 갔던 빈센트는 새롭게 움트는 계절의 빛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나무에는 매일같이 다른 색깔의 꽃이 피어 올랐고, 고흐는 매일 다른 그림을 그렸다. 피어나는 꽃, 수확하는 농부들의 모습, 바닷가의 파도까지 아를의 모든 곳에 빈센트가 꿈꾼 빛과 색이 있었다.


이제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테오와의 편지에서 그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새로운 시대의 화가들은 진정한 빛을 그림에 담기 위해 반드시 아를로 와야만 하니, 자신이 그 화가들을 위해 이곳에 이른바 ‘남쪽의 스튜디오(Studio of the South)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화가들은 함께 모여 살며 그림을 그리고, 이 그림들은 테오가 파리에서 팔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마음씨 착한 테오는 이번에도 형의 꿈을 이해해주었다. 빈센트는 테오의 도움으로 아를의 '노란 집'에 방 4개를 렌트하고, 친구들에게 초대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친구들로부터는 좀처럼 "내가 당장 가겠다..!"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흐의 초대에 응해주었다. 그러나 고갱은 한참이나 시간을 끌었고 1888년 10월에야 아를로 내려왔는데, 테오는 빈센트를 위해 기꺼이 고갱의 교통비까지 대신 내주었다.

     

고갱이 가고 있구나. 형의 앞 날에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아. 형이 애쓴 만큼 다른 화가들도 노란집을 자기 집처럼 느끼게 되면 좋겠다.

동생 테오가 빈센트에게 쓴 편지.
프랑스 파리. 1888년 10월19일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으쌰으쌰 해가면서 여럿 걸작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두 사람 사이에 점차 의견 충돌이 잦아졌다. 매우 상반되는 성격과 그림 철학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고갱이랑 자주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등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얘기하다 보면 서로 엄청 열을 내게 돼. 결국 서로 피곤해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곤 하지. 방전된 배터리 같이 말이야.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프랑스 아를. 1888년 12월17일 또는 18일
귀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쓴 편지      


귀 사건

고흐와 고갱의 다툼은 점점 잦아지고 격해졌다. 그리고 고갱이 ‘남쪽의 스튜디오’가 아니라 ‘열국의 스튜디오’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을 때는 긴장이 극에 달했다. 급기야 고갱이 아를을 떠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빈센트는 제정신을 고 면도칼로 고갱을 위협했다.(라고 ‘귀 사건’ 이후 고갱이 진술했다.) 결국 고갱은 떠나버렸고 빈센트는 자기 귀를 잘랐다. 그리고는 자른 귀를 신문지로 말아 근처 홍등가의 여인에게 전해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여기에 대해서 다른 가설이 있는데, 면도칼을 든 고흐에게 위협을 느낀 고갱이 자신의 펜싱 칼로 맞서다가 잘못 휘둘러 그리 된 것이라는 가설이다.(서프라이즈 방송분) 실제로 고갱은 펜싱을 했었고, 그는 당시 펜싱 칼을 가지고 있었다. 빈센트의 편지 내용 등을 근거로 세워진 가설이지만 믿기 어려운 ‘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꿈

빈센트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테오는 형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크게 상심했다.      

아를 병원에서 형을 봤어. 사람들 말이 형이 며칠간 보인 행동은 끔찍한 정신병 증상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형이 자기 귀를 자른 거래. 이 정신병이 낫지 않는건 아니겠지? 의사 말로는 회복 안 될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 확실하진 않대.

테오가 조(아내)에게 쓴 편지.
1888년 12월 28일


빈센트는 귀 사건에 대해서 거의 기억하지 못한 채 1889년 1월에 퇴원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쪽의 스튜디오'를 만들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빈센트의 마음하게 요동치는 나날의 연속이 되었다. 고흐에게 있어 남쪽의 스튜디오는 화가가 된지 10년이 다 되어 가도록 동생에게 신세만 져오던 것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 같았다. 그 유일한 희망이 마침내 사라지면서, 고흐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고흐는 결국 1889년 5월에 스스로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빈센트 반 고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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