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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연 Oct 27. 2022

1-1. 책이 왜 안 읽힐까?

1부 : 뭐부터 읽을까? - 시작하는 독서가들에게

평소에는 책을 읽지 않다가 책을 읽기로 결심하는 가장 흔한 계기는 새해목표이지 않을까. 일주일에 한 권씩은 읽어야지! 라고 결심하지만 이번 주 못 읽고, 다음 주 초에는 읽었는데 또 그 다음 주에는 못 읽고 결국 읽지 않게 된다... 는 흔한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다시, 책으로>의 저자 메리언 울프는 말하기와 달리 읽기는 배우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신경가소성으로 인해 뇌는 스스로 신경회로를 바꿀 수 있는데, 읽기를 자주 학습할 수록 읽기 회로가 만들어지고, 쓰지 않을수록 읽기 회로가 다르게 재배열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흥미롭지만 책읽기가 어려운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데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 듯 하다. 학생들과 같이 독서과외를 하거나 책읽기 시간을 가지면서 관찰한 경험을 미루어보았을 때 책이 안 읽히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추측된다.

1) 내가 관심 있는 내용이 아니거나, 2) 어려운 말이 많거나, 3) 문장의 의미는 파악할 수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을 때. 이 세 가지 이유가 나타나는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추천도서목록은 잠깐 나가 있어

관심 없는 말에 귀기울이기는 힘들다. 표지와 제목, 홍보물을 보고 책을 사서 보는데, 정작 원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을 때 흥미가 뚝 떨어진다.

독자들은 책을 고르려   '추천도서목록' 먼저 찾게 된다. 문제는 추천도서목록 중에 나의 관심사를 고려하는 목록이 드물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런 추천도서목록들이 그렇다. 10대를 위한 추천도서목록, 서울대학교 추천도서목록 100, OOO 추천한  25 등등, 연령이나 특정 집단, 유명인사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 추천도서목록들은 수많은 독자 군상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는다. 10대의 욕망은 절대 균일하지 않지 않고, 서울대학교 학생이 무슨 책을 읽든 나랑은  관련이 없고, OOO 좋아하는 책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있다. 무작위의 독자들을 겨냥한 추천도서목록들은 시작하는 독서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로를 얻고 싶은 당신에게 추천하는  Best 4,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원하는 당신에게 추천하는  Best 4 같이 예상독자를 같이 명기하는 도서목록은 그보다는 낫지만 베스트셀러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도 해서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읽기를 방해하는 악동 4남매

아는 어휘가 많으면 읽기의 수준은 올라간다. 다만 영어 단어도 예문을 알고 있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듯, 어휘를 활용해 문장을 만들 수 있어야 의미의 전체를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 모르는 말들, 예문을 만들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으면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유독 읽기를 어렵게 만드는 악동 같은 네 명의 남매들을 소개해본다.


첫째, 고유명사

고유명사는 인물의 이름이나, 지명, 상호 등등 특정한 사물에 한정해 나타나는 명사이다. 고유명사가 잔뜩 포함된 글 읽기는 마치 친구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인들에 관한 일화를 별다른 설명없이 이야기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누군데...? 하며 벙찌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어떤 등장인물을 설명할 때 “그 머시기야, 길쭉하고 오이같이 생긴 남자 있잖여”라고 말하는 사람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지만 배우의 이름을 외우기 어려운 것이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 이미지는 기억에 남는다. 생소한 이름들이 많은 텍스트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정보가 많이 담긴 책들이나 등장인물이 많은 소설에서는 고유명사가 많이 등장한다.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벌>의 주인공 이름은 라스콜리니코프로 알려져 있다. 이마저도 쉽게 외우기 어렵지만, 풀네임은 ‘로디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이다. 한국인 이름은 길어봤자 네 자라서 그런지, 유독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는 곤혹스러울 수 있다. <폭풍의 언덕>같은 장편소설에서는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어디 가문 사람이고, 누구랑 누가 결혼하고, 또 이혼하고 별 대소사가 다 일어난다. 관계도를 그리지 않으면 지금 이 사람이 이 사람이랑 결혼한 상태인지, 쟤랑 쟤가 무슨 관계 였던 건지 흐름을 붙잡기 쉽지 않다.


둘째, 한자어.

한국어의 대부분은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 은행, 시계, 음식… 등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들은 한자다. (그렇게 안 보이지만 책冊 역시 한자다.) 한자어는 여러 맥락을 한 글자 안에 압축하고 있기 때문에 피상적으로만 이해했을 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보자면, 회상回想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회고回顧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꽤 많다. 회상과 회고는 '되돌이켜 본다'는 비슷한 의미값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 활용된다. 회상은 지난 기억들을 되돌이켜 떠올려본다는 의미로 비교적 일상생활이나 기사, 에세이 등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회고는 흔히 찾아보기 어렵다. 회고는 회사에서 한 프로젝트를 끝마쳤을 때 다시 프로젝트의 경과를 짚어보며 피드백하고 아카이빙하는 작업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회상이 쓰이는 자리와 회고가 쓰이는 자리는 분명히 다르다. 이런 자리의 쓰임을 잘 모르는 독자는 왜 회고라는 말을 회상으로 바꾸어 쓰면 안되는 건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셋째, 개념어.

개념어는 고유명사와 조금 닮았다. 단독적인 쓰임새를 갖는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고유명사는 다른 단어들과 명확히 구분되는 자기만의 이름을 갖는데 반해 어떤 개념어는 일상어랑 동음이의의 관계여서 쉽게 헷갈리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misogyny’는 오해를 사기 쉬운 개념어 중 하나다.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혐오, 멸시, 차별, 무시, 성적 대상화, 성역화, 신격화 등등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모든 경향성을 포함하는 개념어다. 벌레나 토사물을 보고 징그러워하는 혐오disgust와 의미가 맞닿아있기는 하지만 분명 다른 단어이다.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발언을 두고 (너는 취직 안해도 시집 가면 되잖아) ‘여성혐오’적이라고 지적했을 때 엉뚱한 답변을 하는 경우(이게 여성혐오라고? 나 여자 좋아해!)는 혐오를 misogyny가 아닌 disgust로 이해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개념어는 전문적인 분야의 이야기를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진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지만 처음 책읽기에 진입하는 독자를 다소 당황시킬 수 있다.


넷째, 비유.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는 어려운 말이 없다. 하지만 단어들을 다 안다고 해서 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한 번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일제강점기 시인으로서의 고뇌가 우물 속 사나이로 비유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독자는 그저 우물 앞을 왔다갔다 하는 별 싱거운 남자만 볼 수 있다. 비유는 일상적인 말들을 이상하고 묘한 무대로 옮겨 놓는다. 평소에 자주 쓰는 말과 단어가 시라는 장르 속에 놓여졌을 때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비유는 시에 나타난 말들은 일상적 맥락이 아닌 시적 맥락, 시적 구조 속에 놓아두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다. 시가 아닌 곳에서도 비유적 표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속담이나 사자성어 역시 비유의 영역에 속한다. 비유는 언어의 추상화를 잘 이용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 안에서도 나는 비유를 자주 활용한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책읽기와 읽고 있는 당신의 책읽기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이해범위로 당신의 이해를 끌어들이는, 일종의 번역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비유라는 미끄럼틀(이것도 비유다)을 타는데 멀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왜 꼬아서 표현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장르라는 낯선 손님

안 읽히는 이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이다. 장르는 어떤 작품이 말하는 특정한 양식이다. 같은 연기라 하더라도 뮤지컬에는 뮤지컬만의 톤이 있고, 드라마는 드라마만의 톤, 영화는 영화만의 톤이 있는 것처럼 소설, 시, 에세이, 교양서, 전문서, 외국문학, 외국에세이는 모두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낯선 장르를 마주치게 되면 분명히 문장의 의미를 파악했는데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울 수 있다. 장르에는 그 안에서 공유하는 약속된 문법이 존재해서 특정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장르는 낯선 손님 같아서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알아듣고 무엇을 알아듣지 못하는지를 주인인 내가 기민하게 살펴야 한다. 분명 저 장르는 내게 농담을 던졌는데 나는 그가 왜 웃는지 왜 이 말이 웃긴지 잘 모르겠으니 곤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관심 없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으면 읽기 지루하고, 문장 수준이 맞지 않으면 책장을 넘기기 힘들고, 장르에 대한 이해가 낮으면 읽었는데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렵다. 바꾸어 말하면 관심사, 문장 수준, 장르 이해도가 충족되면 무리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내 관심사에 꼭 맞는 책을 찾는 법, 맞지 않는 문장수준을 극복하는 법, 장르와 친해지는 법을 소개해보려 한다. 절대적인 방법이라기보다 시작하는 독서가에게 유용한 작은 제안으로 받아들여주셨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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