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 책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 고민하는 독서가들에게
EBS <당신의 문해력>의 5장, 245쪽에서는 '렉사일 지수'를 짧게 언급한다. 렉사일 지수란 미국 전역에서 읽기 프로그램에 활용되는 '독서능력 평가지수'다. 렉사일 지수 사이트에 나와있는 설명을 옮겨본다. "Lexile(렉사일) 지수는 미국의 교육 연구기관 MetaMetrics® (메타메트릭스) 사에서 개발한 독서 수준 지표로서, 도서의 난이도를 BR(Beginning Reader)에서 2000L까지 수치화했습니다. 독자의 읽기 능력을 측정하는 렉사일 독자 지수(읽기 능력 지수: Lexile reader measure)와 영어 텍스트의 난이도를 측정하는 렉사일 도서 지수(Lexile text measure)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 30여 개 이상의 국가와 미국 21개 주의 공교육에서 정기적으로 렉사일 시험에 응시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영어 읽기 능력 평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국공립학교 교과서 및 추천 도서의 제목 옆에 렉사일 지수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에는 렉사일 지수와 같이 책의 난이도를 가늠하는 독서능력 평가지수가 있는지 궁금했다. 일단 국가가 공인하는 평가지수는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낱말'이라는 기업에서 렉사일 지수와 동일한 읽기 능력 지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방식은 렉사일 지수와 동일해 보인다. 먼저 개인이 'LQ 문해력 검사'를 통해 본인의 읽기 수준을 측정하고, 자신의 LQ보다 약 25% 정도 더 난이도가 높은 책을 골라 읽으라는 식이다. 문제는 낱말(https://natmal.com/)에서 확인할 수 있는 책의 양이 턱없이 적다는 것이다. 지금 읽히는 책들 대부분이 올라와있지 않은 듯하고 초등학생 난이도로 분류된 도서 쪽으로 갈수록 양이 많아지기는 하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 '모모', '아홉살 인생' 등 저학년에게 단골로 추천되는 책들이 나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기 나와있는 목록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낱말'이 제공하는 난이도 분류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책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 같다.
책의 난이도를 등급화할 수 있을까? 자신의 책읽기능력을 수치화하고 그 등급과 비등비등한 책을 읽는다면, 책읽기가 더 수월해질 수 있을까? 일단 모든 책에 난이도를 표기한다고 가정했을 때 장점보다 단점들이 먼저 떠오른다. 책읽기의 주요한 동기 중 하나는 지적 향상심으로, 이해할 수 없고 어려운 말들이 가득한 책은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의 읽기능력을 초과하는 텍스트를 마주하고 씨름할 때에야 독자의 읽기능력은 향상될 수 있고, 그것이 또다른 독서로 이어지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만약 난이도를 표기해 자신의 '레벨'과 맞는 책을 선택하는 경향성이 강해진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책읽기에 대한 동기부여의 기반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한국처럼 유명대학을 중심으로 자본이 구성되는 엘리트주의 사회에서 책의 '등급'은 또다른 종류의 차별의식을 형성할 위험을 내포한다. 에브리타임과 같은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에 '내 옆에 누구누구 레벨 2짜리 책 읽더라'라는 혐오적인 게시물이 올라올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애초에 우리나라 독서교육은 책에 난이도를 매기는 데 익숙하다. 초등학생 4,5,6학년 부터 고등학교 3학년에 이르기까지 나이에 따라 읽을 수 있는 책의 추천목록을 제작해 배포했던 많은 사례들이 떠오른다. 실증적인 근거가 부족한 추천도서목록보다 언어연구를 통해 촘촘하게 설계된 등급표가 훨씬 더 신뢰할만 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책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책읽기에 막 진입하려고 하는 독자들에게 난이도 표기는 향유경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여지가 충분하다. 남들이 강요하는 어려운 책을 붙들고 골머리 썩히다가 책에 학을 떼는 것보다는 공인된 난이도를 확인하고 천천히 텍스트와 점진적으로 익숙해지는 건 좋은 전략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으러온 사람이 처음부터 100kg 짜리 바벨을 들 수 없듯이, 책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역시 처음부터 어려운 책을 덥석덥석 읽기는 힘들다.
앞서 1부의 1장에서 '읽기를 어렵게 하는 악동 4남매'를 소개했었다. 고유명사, 한자어, 개념어, 비유는 내가 마주한 어려움에서 경험적으로 추출한 자의적인 구분이라 실증적이지 않다. 이 구분은 내가 자구적으로 사용하는 난이도 구분법으로 밑줄 치기로 난이도를 가늠한다. 밑줄이 많을수록 어렵고, 밑줄이 적을수록 쉽다. 그러나 나에게는 난이도가 10점 중 8점짜리였다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고작 3점일 수도 있다. 절대적 수치로서 책에 난이도를 매길 수는 없다. 만약 절대적이고 실증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난이도 분류가 어렵다면, 경험적이고 가변적인 방법을 시도해볼 수는 없을까? 마치 배심원들처럼 책읽기 배심원이 있다고 하면 어떨까?
나이대별로 11세부터 70세까지 균등하게 사람을 선정한다. 이때 독서량이 지나치게 적거나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제외하고, 특정 장르를 편독하는 사람은 우선순위를 낮춘다. 약 30명 정도의 사람들을 모아 1년 동안 독서모임을 실시하는 것이다. 독서모임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책의 '난이도'에 대해 토론한다. 지역을 중심으로 해 전국에서 도, 혹은 시 마다 공인된 독서모임을 선정하는 것이다. 책 목록은 출판편집자, 사서, 문체부 공무원 등등 책의 건전성이나 화제성, 대표성, 장르적 다양성 등을 골고루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맡아 선정한다. 마치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평결을 하듯이 책읽기 배심원들은 해당 책의 난이도를 저울질한다. 이때 난이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 평가하는 기준은 앞서 말한 고유명사, 한자어, 개념어, 비유의 빈도와 정도로 해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청소년 소설 베스트셀러인 <아몬드>를 예시로 들어볼까? 사람들은 <아몬드>에서 사용된 어휘들의 난이도를 먼저 살핀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특별히 일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어휘들은 많지 않다. 아마 한자어 영역에서 <아몬드>의 난이도는 낮은 축에 속할 것이다. <아몬드>라는 제목은 인간의 뇌에서 감정조절 기능을 담당하는 '편도체'의 모양이 마치 아몬드와 닮았다는 데에서 지어졌다. 아몬드는 편도체를 지시하는 보조관념이면서 소설의 질감을 결정하는 미적 구성물이기도 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몬드>의 제목이 왜 아몬드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유 영역에서는 난이도가 소폭 상승할 것이다. 편도체라는 말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편도체는 한자어이고 전문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영역에서도 난이도는 조금씩 올라간다.
여기서 난이도에 대한 심의는 각 배심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대표성을 충분히 의심하면서 최대한 공적인 맥락을 형성함에 따라 완성될 수 있다. 12권의 책의 난이도가 결정되면 해당 배심원단은 해산하고, 그 다음해에는 다른 배심원단이 결성된다. 난이도가 책정된 12권의 책들은 다른 책들의 난이도의 기준점이 되는, 일종의 기축통화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아몬드>를 읽었다면, <페인트>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상상에는 헛점도 많고 결점도 많다. 어쩌면 이미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고 나는 알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여전히 책의 난이도를 매겨 표기하는 것에도 찬반이 극명히 갈릴 수 있다. 그러니 이야기를 좀 더 진행시켜볼 수는 없을까. 작은 의견을 보태 책을 우리가 더 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