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가 왔다. 언박싱을 하기도 전 알싸한 마늘냄새가 코끝을 건드린다. 토실하고 야무진 마늘이 두 접, 먼 길 오느라고 수고했으니 허리끈 풀고 편히 쉬라고 박스를 열어 시원한 곳에 둔다.
무거운 마늘박스를 현관 앞까지 올려다 준 택배기사님이 다녀간 뒤 또 다른 택배가 도착했다. 박스 안에서 크고 작은 감자들이 뽀얀 얼굴을 드러낸다. 어제까지 땅 속에 있었던 감자는 아직도 촉촉한 땅기운이 남아있다.
기나긴 장마처럼 마음도 눅진해 있는 요즘, 흙냄새 가득한 두 개의 박스가 생기를 준다. 박스에 담긴 마늘이나 감자도 뿌듯하지만 보내준 이의 마음이 더욱 푸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늘은 딸의 시부모님 즉 사돈이 보내주신 그 지방의 특산물이다. 아이들이 결혼 한 첫 해부터 지금까지 열여섯 해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보내주는 마늘. 마늘농사를 짓는 것도 아닌데 해마다 보내오는 마늘을 받을 때마다 고맙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교차된다.
좋은 건 마늘 밖에 없는 곳이니 부담 갖지 말라며 마음의 무게를 덜어주셨던 사돈에게 전화를 건다.
"사돈 올해도 마늘이 실하네요 늘 받기만 해서 죄송해요 "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아직도 어렵고 조심스럽기만 한 사돈끼리 진솔한 속 마음을 짧게 주고받는다.
내 집 아래층에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간 수수맘은 딸처럼 곰살맞았다. 고양이 '수수'로 인해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상냥한 그녀가 이사를 간 뒤 한동안 허전했을 정도로 그의 빈자리가 컸다. 그런데 이사를 가서도 우리의 관계는 끊이지 않았다. 노을이 진다고, 꽃이 피었다고, '수수'가 개냥이가 다 되었다고, 꾸준히 소식을 전해주는 그녀였다.
"저 지금 아버지 집에서 감자를 캐고 있어요"
어제는 강원도 홍성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의 밭에서 감자를 캔다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오늘 싱싱한 감자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땅 속에서 막 캐낸 감자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느꼈던 상쾌함이 드러나는 것 같다.
어른의 주먹보다 큰 감자에서는 그녀의 환호성이, 아직 덜 자란듯한 어린 감자에게서는 쾌활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근래에 비를 핑계 삼아 집에만 있었다. 오늘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감이 도착했으니 그다지 무료한 일상은 아니다. 남편과 함께 마늘 껍질을 벗겼다. 알이 굵고 뽀얀 마늘씨가 단순노동의 지루함을 반감해 준다.
마늘은 우리의 일 년 치 양념이다. 김장철이면 나는 빻아서 얼려둔 마늘로 김치를 담는다. 절인 배추에 마늘양념을 넣고 버무리면서 사람들도 이처럼 서로 어울리는 궁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봄날에 꺼내먹는 묵은 김치처럼 감칠맛 나는 인연의 맛, 아이들로 인해 맺어진 우리의 관계도 해마다 익어가고 있다.
간식으로 먹을 감자를 찌고 있다. 구수한 감자 냄새가 집 안에 가득하다. 포실한 감자를 먹다가 아래층에 사는 은하수(애완견 이름)가 감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함께 나눠먹을 친구가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