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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ul 24. 2024

발품을 팔다

오래전에 노후를 위한 준비작은 아파트를 하나 마련해 두었다. 얼마 전 그곳에서 살던 세입자가 이사를 가고 새롭게 리모델링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코시즌 이후에 건축자재값이 폭등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자재값도 올랐지만 그보다는 인건비가 훨씬 오른 것 같았다.


부엌 싱크대와 화장실 집기 및 타일교체, 베란다와  다용도실 페인트 칠하기, 벽 도배하기, 마룻바닥 깔기. 전등과 스위치 교체등. 작은 아파트지만 생각 외로 공사가 컸다. 집 근처에 있는 리모델링 회사에서 견적을 뽑아보았더니 일 년 치 월세금액이 고스란히 들어가는 가격이었다.


'편하게 살면 돈이 들고 발품을 팔면 몸이 힘들다' 시간을 쪼개어 일을 하던 젊은 시절과 달리  은퇴 후에는 시간이 넉넉하다.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고치는 일 우리가 직접 발품을 팔아 알아보면 어떨까? 남편과 의기투합했다.


서울이 좋은 이유 중에 하나는  많은 물자가 모이는 곳이라는 점이다. 을지로에는 각종 도기상가들이 즐비하고 방산시장에는 지물포 대리점이 밀집해 있다. 건축자재와 전기재료를 파는 상가들도 모두 주변시장 부위치하고 있어서 하루쯤 시간을 내어 알아보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중에 몇 군데에서  견적을 뽑아 보았다. 발품을 팔 이유가  충분하다는 느낌이 왔다.


남편과 함께 편한 복장으로 종합시장에 견적 나들이를 하면서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했다. 광장시장의 노점상 의자에 앉아 빈대떡과  막걸리마셔보고 이동식 카페에서 아줌마가 타주는 냉커피도 사 먹었다. 주변에 있는 중앙시장에서는 품질 좋은 건어물을 사느라 잠깐 한눈을 팔기도 했다. 지나가는 길에 차창밖으로만 보았던  종합시장와서 직접 러보니  그동안 내가  편안함의 값을 많이 치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급에 따라 차이가 나는 자재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면 어느 상가나  전문기술자들과  연계해서 언제든지 원하는 날짜에 공사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 시장 상가들도 조금씩 가격차이가 있었다.  여러 곳을 들러 그중에서 가장 적당한 곳을 골라야 하기 때문에 발품을 파는 일도 보통 고된  작업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싱크대를 제작하고 화장실에 설치 변기와 세면대를 선택한 뒤 타일의 질감과 색깔을 랐다  벽지와 바닥의 재료까지 주문하고 나니 뭔가 큰일 하나를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을 고치는 작업의 진행순서에 따라 자재를 신청하고 철거비용 유무까지 확실히 정한 뒤에  계약금을 건네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결혼하여 줄곧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도 처음 와보는 이곳 도매 시장,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삶의 한 면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가 서울 딸네집을 처음 오셨을 때 "서울이 참 좋구나"라고 한 곳은 63 빌딩도 아니고 백화점도 아닌 노량진 수산시장이었다. 싱싱한 생물들이 펄떡거리는 모습,  외치며 팔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 이런 생동감 있는 삶의 현장에서 산지보다도 더 싸고  좋은 물건을 사들고 오면서 흐뭇해하셨다.  오늘은  내가 그런 기분이  든다.


자재만 따로 구입한다고 해서 공사를 시작하는 건 아니었다. 진짜 발품이 남아있었다.  아파트는 단독주택과 달라서 공사 중에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소음으로 인해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공사 전에 미리 주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리모델링 업자에게 맡겼더라면  그들이 다 알아서 할 일들이다. 즉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직접 발품을 팔이야 했. 


처음 보는 이웃의 집에  벨을 누르는 일,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주기까지 어색한 미소를 거두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일은 참 어려운 숙제와도 같았다. 어쩌랴 이왕 우리가 나서서 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역시 시간은 돈이다, 남아도는 시간으로 발품을 팔았을 뿐인데 내 지갑에서 나가야 할 돈이 훨씬 줄어들었다.ㆍ.


"여보  우리 리모델링회사 차려도 되겠다"


"앞서 가지 마"


고백하건대 이런 발품은 십 년에 한 번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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