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입원한 지도 두 달이 되었다. 벌써?라는 말은 환자인 남편에게는 무척 무례한 말이다. 하루가 일 년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남편에게 두 달은 이십 년. 혹은 그보다 더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처음 병원으로 실려왔을 때와 비교해 보면 남편은 지금 많이 나아진 상태다. 우선 머리를 스스로 들 수 있다. 수수처럼 축 쳐진 머리를 가눌 수 없어 누워만 지내던 남편이 목에 힘이 생기고 머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허리에도 힘이 생긴 듯하다. 하루에 20분쯤 침대 머리를 올려서 등을 펴고 앉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이제는 재활병원을 알아봐야 된다고 한다. 그렇게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정작 다른 병원을 알아보라 하니 걱정이 앞선다. 재활보다는 우선 연하(목으로 음식넘기기)가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다. 산호호흡기를 차고 콧줄로 음식을 공급하면서 재활이 가능할까? 그렇다고 계속 대학병원에만
있을 수도 없다.
딸아이는 아빠를 받아줄 재활병원을 알아보려고 회사에 연가를 내고 이곳저곳 발품을 팔고 있다 하루하루 힘들고 고달픈 날들을 견디고 있는 우리 가족들과 달리 세상은 연말연시의 분위기에 물들어 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거리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불을 밝히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기독교 재단인 E병원의 일층 라운지에서는 캐럴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 관객은 주로 가운을 입고 있는 병원직원들과 환자의 가족들. 간혹 환자복을 입은 경증의 환자들도 있었다. 귀에 익은 성탄절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음악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다. 캐럴이 이처럼 슬픈 노래였을까? 다들 즐거워하는데 나만 혼자 파도에 떠밀려 멀리서 부유하는 것 같다.
남편이 있는 입원실로 올라가는 내 뒤통수에 캐럴이 눈덩어리처럼 날아와 부딪힌다. 슬프다 외롭다 더욱 쓸쓸하다.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자선냄비의 쨍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내가 못 들은 건지 자선냄비가 사라진 건지 들리지 않았다. 어린 손녀에게 돈을 쥐어주며 냄비에 넣게 하던 일이 생각난다.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지금에야 알았다. 소외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더욱 외로움을 느낀다는 걸,
병실에 와보니 간병인이 남편을 휠체어에 앉히고 있다. 허리와 목의 근육이 되살아났으니 휠체어를 타도 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은 침상에 누운 채로 이동하여 검사실 진료를 받으러 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환자들을 많이 부러워했었다. 남편은 언제쯤이나 휠체어를 탈 수 있을까 했는데 오늘 드디어 내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껏
침대 붙박이로 지내던 남편이 이제는 다른 공기를 맡을 수도 있게 되었다.
휠체어를 탄 남편을 바라보며 조금 전의 우울함이 사라졌다.
방금 나는 휠체어를 타고 온 산타클로스에게 희망이란 선물을 듬뿍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