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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미영 Oct 30. 2022

10. 우울증도 사치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한 수 첫 직장부터 콜센터 상담사를 했었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여러직장으로 옮겨 다니긴 했지만, 모두 콜센터 상담사를 했다. 그리고 이혼 후 돈을 벌기 위해 다시 근무 했던 곳도 콜센터 상담사였다. 직업 때문이었을까, 성격 때문이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우울증을 겪게 되었다. 


28살때 TV를 보시던 엄마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병원에 가보는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때 엄마가 생각하셨던 건 우울증 보다 폭식증이었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과자를 스트레스가 오면 몇 만원치를 잔뜩 사서 그 자리에서 다 헤치워 버리곤 했었다. 그 모습이 걱정이셨던 엄마는 나를 병원에 보내셨고, 5분정도도 되지 않는 면담으로 나는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것도 아주 심가한 우울증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우울증이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성격자체가 워낙 남들과 어울리는 것 보다는 혼자 집에 있는게 좋았다. 그래도 사람들과 어울리면 이야기 잘 하고 잘 어울린다며 주위에 사람도 많았다. 직장에서 겪는 일들은 당연히 직업의 특성상 그러하다고 받아 들였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당연하지 않은 상황을 당연하다고 받아 들이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내안에 우울감은 쌓여갔고 우울증이 되었다. 하지만 약을 먹으나 안 먹으나 별로 다른 걸 느끼지 못했고, 여전히 직장생활 잘 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 좋아했기에 그저 그렇게 지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며 산후우울증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 감정을 느낄 겨를 조차 없었기에 그저 버텼던 것 같다. 내가 손을 놓는 순간 한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워 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루 하루 위험의 순간을 지나고 있는 아이곁에서 나는 우울함을 느낄 시간도 없었으며 항상 혼자 해 나가야 하는 순간들에 우울함을 드러 낼 시간 조차 없었다. 그러다 아이의 발달지연을 알게 되고 틱을 판정 받고는 내가 무너졌다. 그동안 견디고 버텼던 그 순간들이 한순간에 놓아져 버렸던 것 같다. 아이의 틱 진단을 위해 찾은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더 위급한건 나라고 했다. 우울증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내가 많이 지쳐 있었고 우울증이 이미 오랜 시간 나에게 쌓여 있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급격히 살도 빠지고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별거 중이던 어느 날 밤 아이를 재우고 잠들지 못 한 채 누워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죽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나서 옆에 잠든 아이를 발견했다. 이제 5살이 된 아이, 현관문에 손이 닿지도 않는다. 인터폰의 사용법도 모른다. 물론 휴대폰을 사용 할 줄도 모르는 우리는 주택가에 있는 2층이다. 만약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경우 이 아이는 다른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방법도 구조를 요청할 방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버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전 남편과 연애 시절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은 우울증은 삶이 편해서 생각 많은 사람들이나 걸리는게 우울증이라고 했다. 본인으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치열하게 사느라 우울증 같은건 이해 하지 못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아이의 발달지연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우울증이 심각하게 와 있던 상황에서 남편과 이혼과정을 겪으며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남편의 카톡 알림만 울려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 죽을 것만 같았다. 공황장애였다. 그 당시 다른 어떠한 상황에서 다 괜찮았는데 남편의 메시지를 받거나 전화통화를 하거나 생각만 해도 발작증상이 일 났다. 누군가 내 가슴위에서 찍어 눌러 숨을 못 쉬게 하는 것 만 같았다. 실제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한참을 심호흡을 해야만 간신히 호흡이 돌아 올 정도였다. 그 여파로 차를 타지 못 했다. 차를 타고 앞차와 조금만 간격이 줄어 들어도 숨을 쉴수가 없었고, 막힌 공간에 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강도가 많이 약해 졌지만 여전히 증상이 남아 있긴 하다. 나의 가방에는 항상 상비약이 구비되어 있다. 여전히 남편을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 거리고 숨이 가빠진다. 


한창욱 작가의『걱정이 많아서 걱정인 당신에게』라는 책에 이런말이 나온다. 

용서했다고 해서 반드시 화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내 마음속의 미움을 내려 놓는 일이다. 여전히 속상하고 억울한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용서는 남은 삶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라고 말이다. 


나는 내가 정말 죽을 것 만 같아서 남편에 대한 미움을 내려 놓기로 했었다. 여전히 밉다. 여전히 화난다. 여전히 억울하다. 남편 역시도 그 사람 입장에서 같은 감정을 느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황장애까지 겪고 나니 내가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디스크 수술을 하고 이혼이 확정되고 친정에 있던 나는 대구 집으로 다시 나왔다. 그때부터 내가 불안했던 엄마는 하루에 3번씩 나의 생사확인 전화를 하셨다. 원래에도 우울증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고, 친정에 있을 때 공황장애로 한참 힘들어 하던 걸 바로 옆에서 보셨으니 혹여 혼자 대구로 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까 걱정이 많은 셨다. 


하지만 나는 버텨야만 했다. 누구보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에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아이가 눈에 밟혔다. 내 아이를 지키지 못 한 엄마인데 평생 엄마 없는 아이로 자라게 할 수 없었다. 

 최근에 우울증도 사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났다. 우울증은 결코 본인이 쉽게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평생 우울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도에 따라 전문의의 도움도 필요하고, 다 나았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튀어 나올지 알 수가 없다. 어떠한 고통에 따라 사람들 마다 느끼는 강도가 다르다. 어떠한  상황에 따라 다들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도 모두 같을 수 없다.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뭔가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은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우울하고 기분이 쳐져 있는 것도 아니다. 결코 쉽게 봐선 안 되는 증상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시선으로 바라 볼 증상도 아니다. 나름의 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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