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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미영 Oct 30. 2022

12. 30대를 지우다.

최근들어 자꾸 20대 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20대때가 그리 행복했다거나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꿈도 재능도 없었던 나는 그저 돈을 벌어야 하고 경제 활동을 해야 하니 처음 시작했던 콜센터 상담사로 계속 일을 했을 뿐이었다. 치열한 실적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다른 팀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오로지 일에만 집중했던 때였다. 그럼에도 왜 자꾸 20대때가 생각날까. 그래서 30대는 왜?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31살때 연애를 시작 해서, 32살때 결혼을 했고 그 다음해인 33살에 아이가 태어났다. 37살에 2번째 디스크 수술을 했고, 38살에 이혼을 했다. 나의 30대는 오롯이 결혼생활과 아이에게 치우쳐져 있었다. 결혼부터 임산 중 겪었던 일들, 결코 쉽게 지나갈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니었다. 결혼전 남편의 채무를 해결해야 했고, 그 와중에 태어날 아이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친정오빠에게 빌린 1천만원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결정된 회생을 갚아나가야 했고, 친정오빠에게 빌린 돈은 마음의 짐까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했다. 


뱃속에서 처음부터 위태 했던 아이는 아픔을 가지고 태어 났고, 매일 인큐베이터에 슬픔을 안고 면회를 가야 했다. 출산후 제왕절개 부분이 곪아터져 수술 부위 중 한곳이 벌어졌었다. 아이를 면회를 매일 가는 길에 나는 수술부위 고름을 매일 짜내고 소독을 한달을 했다. 2번의 수술과 패혈증까지 이겨낸 아이는 또 다시 항바이러스제 투여를 위해 수술실에 들어갔다 의식을 못 찾기도 했었고, 그 이후에도 20번이 넘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가장 많은 입원을 했던 것은 폐렴, 그 다음이 장염, 그리고 기관지염까지… 증상이 다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질병에 걸렸었다. 백혈구 수치가 백혈병 환자 정도 만큼 떨어져 입원을 했던 적도 있었다. 


몸의 증상이 조금씩 나아질 때쯤 아이의 발달지연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기고, 서고, 걷고 발달해야 할 시기에 병원에 오래 있으면서 제때 발달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며 오랜 병원 생활로 몸에 대한 자극에 굉장히 예민하다고 했었다. 우리 아이는 5살 때도 쇼파에서 뛰어 내린적도 없었으며 야외에서 뛰다가 넘어진 적도 없었다. 본인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게 될 자극에 대한 두려움이 강해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리고 워낙 오랜 병원생활에 본인이 하지 않아도 주위에 도와주는 손길이 많다 보니 발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인지가 되어 있다고 했었다. 심리,언어,인지,신체 치료 등 할 수 있는 치료는 최대한 해주고 싶었다. 내가 무지해서, 내가 알지 못 해서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아이에게 전전긍긍만 하느라 오히려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아이에게만 올인 하던 중 아이는 틱장애까지 왔다. 여전히 지금도 틱 증상은 있다. 그때는 눈만 깜빡였는데, 현재는 음성틱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엄마인 내가 곁에 없어서 내가 더 케어해 주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는 자책감이 든다. 


그렇게 이혼을 하고 아이를 남편에게 보내면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고 디스크 수술을 하고 많은 것들을 놓아버렸다. 

내 마음과 감정속에서 놓아버렸다. 그렇게 힘들게 버텨 냈었는데 어느 한순가 툭 하고 놓아 버리고 나니 그 시간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살기 위한 나의 최선의 방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들이 자꾸 떠오르면 내가 너무 견디기 힘이 들까봐 나 스스로가 그 시간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 버린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때인가 나의 30대가 통째로 지워져 버렸다. 아이의 어린 모습이 어떠했는지, 끝없는 터널 같았던 그 시간들이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때 그 당시에는 그랬다. 키보드의 delete키처럼 클릭 한번으로 그 시간들을 지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순간 순간들이 너무 숨막히게 힘들고 지쳐 한 번에 삭제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인지하지 못 했던 그 순간들 속에 감쪽 같이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 힘겨웠던 시간속에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방어였었나 보다. 

그러면서 나는 아이가 생각났다. 내가 그 힘겨웠던 시간들이 잊혀졌듯 우리 아이도 아프고, 슬펐던 그 시간들이 사라져가길. 행복한 순간들만 기억에 남길 말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인 것 같다. 우리가 자동적으로 훌륭해진다는 게 아니라 그럴 기회를 얻는 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강자인 내가 철저히 약자인누군가에게 가슴 깊이 우러나는 존중감으로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 자식이 아니면내가 누구를 상대로 이런 사랑을 해보겠는가. _정수연『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다. 』


나는 우리아이가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 수많은 위기 속에 생명의 위기속에서도 꿋꿋히 질기게 이겨낸 아이다. 겨우 5살에 엄마와 떨어져 고모의 눈치를 보고 아빠의 눈치를 보며 엄마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은 채 이겨낸 아이다. 한 없이 나약하고 힘든 순간이 오기전에 도망부터 쳐 버린 나에게 조금은 더 강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이 아이를 내게 보내 주신건 아닐까. 이 아이를 통해서 내가 더 배우고 강해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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