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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미영 Oct 30. 2022

13. 그럼에도 또 웃게 된다.

아이를 보낸 후 더 괴로웠던 건 아이를 볼 수 없는 슬픔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리다고 자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 했을때, 그럼에도 배고프다고 꾸역 꾸역 밥을 챙겨 먹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았을때, 그럼에도 TV를 보며 즐겁다고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이 아이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울고 불고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 잡고 대성통곡을 했으면서 졸리다고 잠을 잤다. 배고프다며 밥을 먹었다. 하물며 더 맛있는게 뭐가 있을까 찾기도 했다. TV를 보며 잼있다며 희죽 희죽 웃고 있었다, 

그 아이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내 삶이 끝이 나는 줄 알았다. 정말 나는 우리아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줄만 알았다. 


처음에는 아이가 어린이집 갈 시간, 밥 먹을 시간, 잠 자는 시간 등… 무엇을 할까 잘 지내고 있을까 걱정이 끝도 없었다. 특히 면접교섭권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TV도 보지 못 했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나의 하루는 온통 슬픔 뿐이었다. 


그러다 아이를 실질적으로 만나고 아이를 내품에 안고 눈을 마주치며 나의 불안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우연히 TV를 보며 웃기라도 하면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는 어떤 아픔속에, 어떤 슬픔들을 이겨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속도 없이 웃고 있다는게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즐거운 일에도 제대로 웃어보지 못 했고, 나는 행복해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3년 정도 지난 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었다. 매일 매일 주어지는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프로그램이었다. 사실 그 프로그램을 참여 하게 된 것도 살기 위해서였다. 수


술을 하고 이혼을 하고 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회생이 남아 있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기에 몸 상태를 알고 있음에도 다시 콜센터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몸상태로 힘을 쓰는 일을 할 수도 없었고, 30대 후분의 나이에 나를 써 주는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사무보조 업무 조차도 나는 콜센터 경력 밖에 없어서 인지 매번 떨어지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콜센터에 들어 갔고 그로부터 2년 후 디스크재발판정을 받았다. 2번의 수술에도 또 다시 재발이었다. 


사실 2번째 수술 당시에도 굉장히 심각한 상태였다고 했다. 4,5번 척추의 왼쪽을 이미 수술한 상태에서 오른쪽이 발병하여 수술을 해야 하는 상태였고, 5,6번도 상당히 많이 디스크가 진행된 상태였다. 그때 이미 내 몸상태는 인공디스크를 삽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인공디스크를 넣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라 돌출된 디스크를 절단하는 수술을 했었는데, 동일 부위에 왼쪽,오른쪽 모두 디스크를 제거한 상태다 보니 그곳에 퇴행성협착증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래쪽도 디스크가 더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이대로 생활이 불가한 통증이 오면 인공디스크 2개를 삽입해야 하는 상황이라 더 이상 직장생활은 어렵다고 퇴사를 권고 받았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1년을 쉬며 내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고,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하여도 아쉬울 것 없는 그저 숨만 쉬며 하루 하루 시간만 죽이고 있던 시간이었다. 매일 밤 잠이 들 때면 내일 눈뜨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 날들이었다. 


그러다 글쓰기 프로젝트 모집글을 보았다. 그 프로젝트는 원래 직장생활을 할 때부터 눈여겨 보았던 것인데, 시간이 맞지 않아 하지 못 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을 진행 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신청사유를 엄청나게 적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마디를 남겼다. “살고 싶어서” 라고 말이다. 일상에 바라는 것은 없었으나 죽어도 아쉽지 않다고 했었지만, 어쩌면 더 절실히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매일 주어지는 주제에 하나 하나 답을 찾아가다 어느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도 이젠 좀 웃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나도 내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동안 행복해지면 왠지 아이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제대로 행복해 지려 하지도, 즐거워 지려 하지도 않았다. 늘 아이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진 삶이이었다. 하지만, 이젠내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하게 하는 말로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 했었다. 그러다 별거기간 동안 내 마음이 불편하니 아이에게 소리지르는 날도 짜증을 내는 날도 많아 진다는걸 알았다. 그렇다고 당장 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보내고 늘 칠흑 같은 어둠속이었던 내가 이젠 나도 좀 행복해 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보내고 몇 년이 흐르고 내 마음이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가니 아이에게 한번 더 웃을 수 있는, 아이를 한 번 더 안아줄 수 있는 마음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우고, 이혼을 하고, 주말마다 아이를 만나며 10년이라는 시간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하는데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들의 대부분을 나는 아픔과 슬픔속에 살아왔다. 


그 시간들 속에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또 새로운 날들속에 더 웃게 되는 날도 찾아왔다. 시간이라는 약이 나를 조금씩 치유해 주고 있었고, 이젠 좀 웃어도 된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쉬운 말로 이혼이 죄는 아니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혼한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본다. 누가 어딘가에 문제가 있으니 이혼을 했겠거니 하고 말이다. 이혼은 특별한 몇 몇 사유들 외에 보편적인 경우 어느 한쪽의 이유만으로 이혼하지는 않는다. 다들 너의 잘 못이다라고 말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결국 나의 잘 못도 있기 마련이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듯, 어느 누구 하나만의 잘 못으로 이혼까지 가지는 않는다. 나 역시 그랬다. 남편의 잘 못 이었다고 하겠지만, 그걸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혼은 누구만의 잘 못도 아니며 죄도 아니다.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혼도 신중해야 하고 이혼도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신중하되 단호해야 한다. 

부부로서 생활이 더 행복할지 혼자로서 생활이 더 행복할지, 그리고 혼자 살아가기 위해 닥쳐올 수 많은 일들과 경우의 수들에 대해 힘들지만 버틸 자신이 있는지 단호하게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무섭다, 겁난다라는 결론으로 끝을 내어서는 안된다.

결혼도 행복하기 위해 선택하듯이, 이혼도 나의 앞으로의 삶이 행복하기 위해 선택해야 한다. 결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도, 다른이들의 시선에 의해서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혼 후의 삶 또한 내 삶이고 소중한 내 인생이다. 그런 소중한 내가 행복하다면 단호하게 결정을 해야 한다. 


나는 이혼을 절대 후회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 상태로 더 오랜시간 부부라는 호칭 아래 있었다면 난 아마 더 힘들어 졌을 것이며 아이에게 그 모든 감정을 쏟아 부으며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을 테니 말이다. 이혼이 나만의 잘못도 아니고, 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의 아이에게는 세상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사랑을 다 주지 못 했고, 그 많은 슬픔과 힘듬 속에 살아가게 했으며, 앞으로 살아가며 알 수 없는 수 많은 시선을 이겨내야 할 지도 모르니 말이다. 적어도 엄마,아빠가 함께 하는 가정속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뺏었으니 말이다. 그건 평생 내가 살아가며 아이에게 갚아야 할 빚이다. 


그럼에도 이젠 나도 좀 웃으며 나의 삶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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