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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고 만두 다섯 개, 피자 한 조각, 귤 두 쪽

by 하납날목 Jan 27. 2025


12월 27일 금요일 친구와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새해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사실, 집으로 가는 길은 편하지 않다. 사랑하는 엄마가 있는 집이지만 일단, 내 방이 없다. 오래 집을 떠나 살기도 했고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오빠에게 내 방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집에 갈 때는 엄마와 같이 방을 쓰는데, 엄마는 올빼미형 인간이라서 집에 오면 덩달아 늦게 잠을 청하게 되고  결국, 나는 생체리듬이 깨져 비몽사몽 한 한 마리 참새가 되곤 한다. 생물학적으로 '동생'역을 맡고 있지만 집에서 정신적 장녀 역할을 맡고 있다. 집에 가면 가족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더 크기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한다. 이번에는 연말에 가족끼리 밖을 나가기보다 집에서 쉬는 걸 택했다. 나도 내 나름대로 살 방법을 찾은 것이다.

 말로는 ‘쉰다’라고 했지만 또 온전히 쉬진 않는다. 죽은 듯이 침대에만 누워있는 건 내 체질이 아니다. 가족들이 밖에 나가 있을 동안 마실 수 있는 따끈한 쑥물도 끓여 두고, 같이 먹을 꾸덕한 파스타도 만들고, 진공청소를 위잉 위잉 돌리고, 매번 투박하게 점심을 싸가는 엄마가 먹을 도시락도 꼭꼭 쌌다. 하하 내가 생각해도 우렁각시가 따로 없다! 이렇게 부산히 움직이는 이유는 집안일은 엄마의 일도 오빠의 일도 아닌 ‘가족 모두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편한 이유는 누군가의 수고가 있다’라는 글귀를 본 뒤로 쉬더라도 부지런히 움직이려고 한다. 근데 가끔은 철없는 막내딸 역할을 자처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2024년의 마지막 날에도 부산히 움직였다. 전에 자취할 때 사용했던 짐들이 복도 벽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좀 더 휴식공간인 집 느낌에 걸맞게끔 정리를 해 두고 싶었다. 무튼, 무리해서 청소했는데 문제는 저녁에 터졌다. 절임 배추가 배달 온 것이다. 아뿔싸.
 우리 엄마에 대해 소개하자면 엄마는 요리를 썩 잘하지 못한다. 육아, 집안청소, 일까지 하는 워킹맘으로 한평생을 살아온지라 요리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걸 이해한다. 김치는 매번 할머니, 엄마 친구분들이 나눠 주신 걸 먹었다. 받은 김치를 먹을 때면 아삭-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유산균이 톡톡 터져서 사이다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엄마의 재밌는 또 다른 부분은 음식을 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설명서 따위 그녀에겐 한낱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지난번에 김치를 만들 땐 뜨거운 찹쌀풀을 그대로 배추에 버무리는 바람에 유산균이 죽어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엄마가 만든 김치는 먹지 않았다. 왜냐. 색깔부터가 남달랐다. 맛깔난 빨간 고추색의 김치여야 하는데 딱 봐도 주황색의 시큼 털털해 보이는 김치 모양이었다. 김치색이 왜 주황빛 마라탕색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번에는 김치의 신이 되어보겠다는 호기로운 다짐을 적어둔 종이를 본다. 엄마 말로는 1월 6일 날 절임 배추가 배달 온댔는데 배달이 일찍 와버렸다. 틀림없는 올빼미과인 엄마는 저녁 9시부터 김장을 담근 댔다. 당연히 말렸다. 그래도 김장 준비를 해야겠다며 어둠을 뚫고 기어이 마트에서 멸치액젓과 새우젓을 사 왔다. 나랑 오빠는 힘들어서 김장은 못 도와주겠다 하니 혼자서 김치를 담그겠다고 한다. 엄마. 딱 봐도 20 포기는 되어 보이는데?

다음 날 우당탕탕 부산히 움직이는 엄마의 움직임에 무거운 눈꺼풀이 부스스 떠졌다. 온몸으로 김치를 해보겠다는 다짐이 들린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엄마를 돕는다. 배가 고파서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한 조각 먹고 작업을 계속한다. 멸치액젓에 새우젓, 설탕을 넣고 정성을 넣는다. 이번에는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보겠다며 유튜브도 참고해서 레시피를 적어두었단다. 배추에 빨간색 옷을 입히기를 여러 번, 허리가 아파온다.

“엄마, 이거 어떻게 혼자 담그려고 했어? 혼자 못 담가!"

김치와의 치열한 사투



어휴, 힘쓸 때는 오빠가 필요한데. 밤새 뭔가를 한다고 안 자서 이제 잠을 청했단다. 에효효 저 쓸모없는 새끼. 키는 정승만큼 크면서 오빠나 돼가지고. 힘쓸 때 쏙 방에 들어가 버리다니. 입에 욕이 쌓여 삐쭉 입술이 튀어나온다. 소를 다 버무린 김치를 통에 담다가 엄마가 내 발에 김치 양념을 커다랗게 떨어뜨리고 말았다. 엄마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오랜만에 엄마의 진짜 웃음을 보는 것 같았다. 어이없고 황당해서도 있지만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웃는다. 김치를 다 담그고 나서 너무나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하랄없이 유튜브를 본다. 엄마는 그런 내 눈치를 본다.

“엄마, 방에 왜 왔어! 나 혼자 좀 쉴래.”

나는 힘들 때 혼자서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는 내심 집에 와서 일하고 가는 딸에게 미안했나 보다. 계속 혼자두지 않는다. 갑자기 직장 동료 분이랑 쇼핑하러 가는 걸 취소했단다. 눈물이 비죽 나온다. 아니 나는 그냥 혼자 쉬고 싶은데. 엄마는 왜 내 눈치를 보는 거야. 그냥 엄청 수고했다고 그 말 한마디면 되는데.

“김장하느라 너무 고생했어. 아유, 우리 딸내미 뭐 치킨이라도 시켜야겠다. 어디 거 사줄까!"

엄마. 이 마법의 한마디면 돼. 치킨 사준다고 말하고도 냉장고에 있는 치킨 텐더 한 마리 에어프라이기에 구워주도 돼. 투덜투덜 눈물 찔끔 흘리며 기숙사로 간 딸을 본 엄마는 내심 미안했나 보다.

‘공주. 무리한 김장으로 오늘 손목은 어떤지… 도와줘서 많이 고마워’

카톡이 띠링- 울린다. 외할머니도 여든이 넘으셨지만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김치를 담그곤 하셔서, 엄마도 남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닮은 것 같단다. 집도 리모델링만큼 청소를 해둬서 차마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엄마가 카톡으로 마음을 전한다. 이렇게 마음을 전해주는 엄마가 고맙다. 기숙사로 오기 전에 엄마한테 집밥해 달라고 했다가 회사로 가기 너무 늦었다고 그냥 밥을 싸 달랬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열어본다. 비비고 만두 네 개, 피자 한쪽, 오렌지인 척 예쁜 단면을 닮은 귤 두 쪽. 역시 우리 엄마다.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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