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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모녀 vs 초무거운 침대, 승자는?

아냐, 다 먹어. 엄마 3개도 충분해. 배불러.

by 하납날목
할머니의 사랑이 가득한 설 상차림


'내가 설 명절에 바라는 거 딱 한가지

우리가족 싸우지 않고 다치지 않고
행복하게 하루하루 보내다 오기
나도 잘 쉬고, 내가 먼저 잘 쉬고'


설 명절로 기숙사에서 집으로 출발하기 전 일기에다가 적었다. 일종의 다짐같은 글이랄까. 글을 쓰니까 마음이 편해진다. 머릿속에 둥둥 하염없이 떠다녔던 내용들이 정리되는 기분이라 좋다. 상쾌하다. 막연히 바랬던 내용을 검은색 잉크에 마음을 빌려 끄적끄적 적노라면 마음이 명료해진 기분이 든다. 이게 이뤄지든 안 이뤄지든 난 적는다. 언젠간 이루어지니까.

신기하게도 노트에 적었던 바람들은 다 이루어졌다. 워라벨이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한 것도 이루어졌고,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도 이루어졌고, 영어공부도, 독서도, 에세이도 모든 게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이런 상황에 놓였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이렇게 내 마음을 끄적일 수 있는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도. 유튜브에서 'chill한 플레이스트'를 찾아서 들으며 쓰고있는 지금도 말이다. 갈색 표지의 일기장과 알록달록한 스티커를 가방에 담으면서 '이번 명절에는 일기도 잊지말고 꼬박꼬박 써봐야지' 다짐한다.




2시 쯤 집에가니 엄마가 맛있는 고구마를 쪄두셨다. 이번에 집가기 전에 카톡으로 '엄마, 나 집가면 맛있는거 해줘!'라고 말하길 잘했다. 큼직한 노란색 호박 고구마와 뜨끈한 미역국, 샐러드를 해주셨다. 샐러드는 세발나물과 당근을 장작처럼 잘라서 발라믹 소스를 위에 뿌려주셨는데, 솔잎같이 생긴 세발나물의 독특한 생김새와 다르게 맛있게 느껴졌다. 차려주신 밥을 먹고 배가 터질 무렵 찐 샛노란 고구마를 에어프라이어에 반쪽을 갈라서 120도에 6분 정도 돌렸다. 뜨끈해진 고구마 위에 포크로 버터를 쿡- 찍어서 표면에 버터 옷을 입혀 한입 와앙- 물었다. 아- 이 맛이지. 아- 이거지. 쪼그라 들었던 풍선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쉴세없이 먹었더니 어느덧 쇄골 부분까지 음식이 가득 찬 포만감을 느꼈다.




'위기다'
가만히 식탁앞에 앉아있다가 어기적 어기적 몸을 일으킨다.

"엄마, 방 침대 위치 바꾸자"
"지금? 음... 바꿔야 하긴해.. 방문이 안닫히니까... 그럴까?"
"기왕 배부른 김에 하자. 소화도 시킬겸."
"그래 해보자."

우리집 엄마방에는 슬라이딩 침대가 있는데, 윗층에 침대가 있고 아래쪽에 손잡이를 잡아 당기면 매트리스가 있는 침대가 하나 더 나온다. 그래서 평소에는 집에 가게 되면 식구가 하나 더 늘었으니 아래쪽 침대에서 잠을 잤었다. 문제는 슬라이딩 침대가 문쪽에 있어서 방문을 열려면 내가 잠을 청하는 아래쪽 침대를 관짝마냥 바짝 붙여서 자야했다는 거다. 관짝만큼 꺼낸 침대에서 자는 것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좁고 구석진 자리에서 쉬는 걸 좋아하는 고양이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관짝이 조그맣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무튼, 엄마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잠깐씩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시는 편인데, 바로 아래쪽에서 자고 있는 딸래미를 밟을까 걱정을 하셨었다(물론 밟은 적도 여러번 있다). 결론은 문을 쉬이 못열고 새벽에 밟을 위험이 있어 편히 방밖을 못나가는 불편함이 있었다.


매번 집에서 잘때마다 관짝체험하는 기분이었다. But, 나쁘지 않았다.

결론은 오른쪽 벽에 붙여두었던 침대를 왼쪽 벽으로 옮기기로 했다. 침대을 옮기자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문제가 있었다. 매우 무거운 원목침대라는 것이다. 색은 연핑크색인데 귀여운 색과는 대비되게 어찌나 무거운지. 들 수가 없을 거 같았다.

"엄마. 이거 나사 다 풀고 분해해서 옮겨야 할 거 같아. 너무 무거워."

"아니야. 그러면 더 일이 커져. 방 안에서 돌릴 수 있을 거 같은데? 할 수 있어"

"아니, 엄마. 왜 할 수 없는 거 같은데 할 수 있다고 하는거야. 그 때도 조립해주는 아저씨도 하나하나 분해해서 했었잖아. 분해하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

"아냐 할 수 있어. 해보자."


엄마 말은 행거를 한쪽으로 몰아서 세워두고 남은 공간에서 침대를 돌릴 수 있다고 하는거다. 사실을 안믿었다. 너무 무거운걸 어떻게 옮기겠어.


"아래쪽 침대에는 바퀴가 달려있어서 어떻게든 돌릴 수 있으니까 돌리면 되고. 위쪽 침대는 둘이서 바닦에 보자기를 깔든 해서 돌려보자."


일단 해보자고 하니까 해보자. 엄마의 지시에 따라 아래쪽 침대를 꺼내고 침대 밑 공간을 활용해서 180도 돌렸다.


어라라?

되네?

안될 거 같다고 말하고 성냈던 내 자신이 살짝 무안해졌다.


"엄마. 되네?"

"응. 그러게. 엄마도 안될 줄 알았는데 우리가 침대 아래쪽에 공간이 생긴다는 걸 잊었어. 된다."


의외로 난제일 것 같았던 일이 수월하게 풀리자 몸에 온기가 발끝부터 머리까지 싸악- 올라온다. 위쪽 침대도 180도 돌리기로 한다.


" 아래쪽 침대 돌려둔 건 잠시 편평한 부분으로 세워서 두고, 위쪽 침대 아래에다가 보자기를 끼워보자. 한번 돌려보는 거야."

"응. 알겠어 엄마."


지금은 26살을 두번이나 살아내신 분인데 어쩜 이렇게 무거운 물건을 들 때는 나보다도 힘이 좋으시다. 힘쓰는 걸 아까워 하지 않으신다. 엄마,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구.


"엄마, 안되겠다. 가구가 무거우니까 앞코가 단단한 신발 신고 하자."


신발장에서 앞코가 단단한 아디다스 신발이랑 예전에 신었던 안전화를 꺼내서 밑창을 박박 닦고 방안에서 신발을 신었다. 아, 저 아디다스 신발도 내가 엄마 생일선물로 사준거다. 이게 이렇게 쓸모가 있네.

"엄마. 살살해."

"응."


그렇게 가벼워만 보이던 핑크색 가구를 밀었다 당겼다 하며 180도를 돌렸다. 등에는 땀이 비질 흐르고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엄마. 벽에 붙이기 전에 아래쪽 침대도 같이 넣어서 돌리자."

"응. 그래."


벽에 붙이기 전에 세워두었던 아래쪽 침대를 눕히고 아랫쪽 공간을 활용해서 조금씩 돌려본다. 와 됐다. 드디어 됐다. 문 앞을 우뚝 지키고 있었던 높은 행거가 보이지 않으니 방이 더 넓어보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2평 정도 더 넓어진거 같았다.

침대 위치 바꾸고 나서 엄마와 나.


"훨 좋다. 딸 고마워."

"아이, 엄마 난 안될 줄 알았는데 하자고 하는대로 하니까 되네."

"엄마도 될지 몰랐어."

"엄마, 행거에 옷 걸기 전에 좀 쉬자."

"그래, 좀 쉬자."


그렇게 옮긴 침대 위에 둘이서 앉아서 멍하니 쉬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냥 시간이 흐른다는, 초침의 분주한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그냥, 오빠가 일 끝나고 집에 오기 전까지 방안에 있는 옷 옮겨두고 일단 밥먹고 쉬자."

"좋아."

"엄마가 오늘 치킨 구워줄게."


오늘 저녁은 붉은 고추기름이 인상적인 순두부찌개와 버팔로봉, 점심에 먹었던 세발나물, 엄마가 직접담근 총각김치다.


"엄마가 직접 유튜브 보면서 만든거야? 정말로?"

살면서 엄마 음식에 '고추기름'이라는 게 있는 건 처음 봤다.


"응. 그럼. 지난번에 너가 엄마가 요리를 대충하는 거 같다고 했잖아. 그게 맞더라고. 그래서 이번엔 유튜브 좀 참고하면서 만들어 봤어."

"아 진짜? 고추기름도 내고 맛있어보인다. 먹어볼게."


순두부찌개에 고사리랑 달걀도 들어가 있어서 약간의 육계장 느낌에 가까운 순두부찌개였다. 순두부찌개의 특유의 감칠맛이나 짭짤한 맛은 없었지만 슴슴한 느낌이 났다. 그래. 건강에도 좋지 뭐. 버팔로봉은 총 8개를 하셨는데 나보고 5개나 먹으란다.

"엄마. 나 이거 다 못먹어. 너무 많다."

"아냐, 다 먹어. 엄마 3개도 충분해. 배불러."

사진은 찍지 못하여서.. 사촌집에서 먹은 버팔로봉으로 대체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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