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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번데기 볶음밥

라면 후레이크의 쇠고기처럼 보였을 텐데

by 하납날목 Feb 10. 2025


때는 바야흐로 고3 때쯤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내가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셨다. 그때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학부모님이 있었는데, 학부모님 덕분에 엄마는 미군부대에 있는 간식과 전투식량을 집에 가져오곤 하셨다. 그중엔 버터기름이라는 것이 있었다. 콩기름과 똑같이 생겼지만 버터맛이 났다.

엄마는 방과후 학교 선생님, 교습소를 운영하는 바쁜 와중에도 매번 아침밥 저녁밥을 차려주셨다.
공부할 때는 밥을 먹여야 머리가 돌아간다고 말하면서. 아침밥으로 차려주신 음식은 보통은 뜨끈한 된장국이었다. 빨리 먹고 등교할 수 있도록 밥 위에 시래기 된장국 한 국자를 듬뿍 떠서 붓고, 그 위에 스탠 프라이팬으로 갓 만든 뜨거운 반숙 달걀 프라이를 얹어주셨다. 나와 오빠는 호호 뜨끈한 국물을 식히며 후다닥 먹었다. 아침밥으로 햄은 몸에 안 좋다며 어쩌다 한 번, 체감 상 아마 6개월에 한 번 꼴의 느낌으로. 스팸을 선물로 받을 때면 아침으로 일 인당 스팸 네 조각.

너무 늦게 일어나서 바로 씻고 뛰쳐나가야 할 때면 간장계란밥을 후다닥 비벼서 김에다가 둘둘 말아주셨다. 학교에서 먹으라며 말이다. 간계밥 김밥은 항상 우리가 아는 투명한 비닐장갑 안에 넣어주셨다. 비닐은 통풍이 안돼서 밥의 뜨거운 김은 푸르른 김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엄마가 만든 김밥의 모양새는 김밥의 푸른색, 간장의 진갈색, 달걀의 누런색이 섞어 환상의 색조합이 되었고 시큼털털하고 축축한 오이지 같은 모양새가 되곤 했다. 학급에서는 다른 친구들에게 냄새로 피해를 줄까 봐, 모양새가 그렇다 보니 부끄러워서 차마 복도에 서서 먹질 못했다. 창피하지만 몰래 그 간계밥을 후다닥 들고 화장실에 가서 입에 욱여넣고 나왔다. 어렸을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의 의아한 시선을 받길 죽기보다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머리가 돌아가니까.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엄마가 만든 거니까. 차마 버릴 생각 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튼 미군부대에서 일하시는 학부모님이 자주 엄마께 컵에 담긴 시리얼이나 전투식량 같은 것들을 갖다 주신 덕분에 간간히 신기하고도 재밌는 간식거리를 먹을 수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아마 주말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왔기 때문이다. 조금은 어두침침한 늦은 오후의 느낌과 가을의 서늘한 저녁이 집안에 서리었던 기억이 있다.

 
"나와서 밥 먹어."


밥이 준비되었다는 엄마의 목소리가 부엌에서 들렸다.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조금은 피곤했던 것 같다. 누구든 고3의 시간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데 그 끝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이 아니던가. 터널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 끝이 꿈꿔왔던 곳인지 아닌지는 모르기에 그 시기는 어둡다.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방을 나와 부엌 식탁으로 가서 앉았는데 내 눈을 의심하는 볶음밥이 나와있었다.


"아..?"


수북이 쌓인 톱밥 같은 누런 볶음밥 사이로 번데기들이 "하이" 하며 인사하고 있었다. 아. 잠시만. 여기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학교 급식이 맛이 없었던 적이 없다. '맛이 더 있는 날'이 있고 '맛이 덜한 날'의 경중만 있었지 항상 맛있었단 말이다. "학교 급식이 맛없어서 난 오늘 점심 안 먹을래."라며 반에 남아있는 학급친구들의 말을 듣고 밥을 먹을 때면 '왜 맛없다고 하지? 생각보다 꽤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충격적인 비주얼의 볶음밥은 가히 이제껏 내뱉지 않았던 그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갈색깔의 번데기가 완벽한 형태를 자랑하며 밥사이사이에서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고 유독 그날따라 번데기의 주름이 더 선명하고 진하게 보였다. 아. 번데기의 주름이 이렇게 많았었나? 아냐. 그래. 엄마가 일도 하고 와서 밥까지 차려주시는데. 밥투정하면 안 되지. 맞지. 아 근데 당장이라도 번데기가 살아 움직일 것만 같네.

도저히 움직이지 않던 손을 움직여 숟가락으로 한 입 크게 떴다. 입으로 와앙- 한 수저 물었다.
입안에서 미끌한 버터기름이 퍼졌다. 그때는 버터에 익숙하지 않았고 버터기름의 특유한 향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 이건. 아니다. 차라리 번데기를 잘게 다져서 저 선명한 주름들을 감추었다면. 라면 후레이크의 쇠고기처럼 보였을 텐데. 감쪽같았을 텐데. 그지. 아 엄마. 아니면 버터기름 말고 그냥 식용유를 써도 좋았을 거 같은데. 아. 엄마. 머릿속에서 헤매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엄마.

"... 엄마. 나 도저히 못 먹겠어."
"응..? 못 먹겠어?"
"진짜로 못 먹겠어. 엄마 ㅋㅋㅋㅋ 이걸 어떻게 먹어!"

아마 정아는 바쁘고 정신없는 나머지 그렇게 밥을 차려주신 것 같다. 정아는 특히나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때 갖가지 채소와 토마토소스를 넣어 만든 마녀수프도 만들어 드실 줄 알았다. 지금은 마녀수프가 다이어트 음식으로 유명해져서 많이들 알고 있지만 그때는 아는 사람만 알았던 시큼한 맛이 나는 특이한 음식이었다. 건강을 생각해서 햄도 핑크색 그 형체를 머릿속에서 잊어갈 즈음 한 번씩 식탁에 내어 두셨던 걸 보면 말이다. 버석버석한 쌩 보라색 가지를 칼로 감자칩처럼 숭텅숭텅 잘라서 맛없다는 날 앞에 두고 "엄청 맛있네~. 한번 더 먹어봐."라며 권유하셨다. 당근도 그런 식으로 익숙하고 친근한 음식으로 탈바꿈해 냈다. 나와 오빠를 웬만한 음식은 다 먹을 수 있게 키워내신 엄마의 머릿속은 이런 기적의 셈법을 했을 것이다.

번데기: 단백질
+
버터기름: 어머 기름 다 썼는데 마침 버터기름이 있네?
+
밥: 탄수화물
=
탄. 단. 지 모두 충족한 음식(완료)

기적의 논리로 '번데기 볶음밥'이라는 걸 만들어내신 듯했다. 사람이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웃게 된다. 그때 얼마나 비주얼이 놀라웠던지.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그 선명한 볶음밥의 모습과 향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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